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과 만언봉사, 현실로 내려온 성리학
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이와 기가 처음부터 나뉘지 않은 채 함께 있다고 본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세운 인물입니다.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고,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격몽요결》을 남겨 정치 개혁과 교육을 함께 말했습니다.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여섯 사람 가운데 하나예요.
| 항목 | 내용 |
|---|---|
| 생몰 | 1536년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 (향년 49세) |
| 출생지 |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외가 오죽헌(烏竹軒) |
| 부모 | 아버지 이원수(15011561),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 |
| 전통·활동 | 조선 성리학, 서인(西人)의 영수,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름 |
| 대표 저작 |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격몽요결(擊蒙要訣), 성학집요(聖學輯要) |
| 핵심 개념 |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
| 별칭·시호 |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문성공(文成公) |
| 논쟁 사안 | 10만 양병설의 사실 여부는 학계에서 논쟁 중 |
이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이(李珥)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입니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까지 올랐고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어요. 조선 유학사에서 그의 자리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사실이 있는데,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위키백과).
이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던 외가 오죽헌(烏竹軒)입니다. 덕수 이씨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어요. 어머니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불렀고, 아명도 현룡(見龍)이었다가 뒷날 이(珥)로 바꿨습니다.
집안 내력을 보면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과 수운판관, 통덕랑을 지냈고, 어머니 신사임당은 시문과 서화에 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나요
이이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것은 아홉 차례 치른 과거에서 모두 장원급제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아홉 번 봐서 아홉 번 다 수석을 했다는 뜻이에요 (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이이의 재능은 아주 어릴 때부터 드러났습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했고, 그보다 앞서 8세에는 화석정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었다고 전합니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이라는 시예요.
스물세 살 때 치른 별시 과거에서는 천도책(天道策)이라는 글로 장원했습니다. 문학적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훗날 그의 기발이승일도설로 이어지는 생각의 바탕이 이 글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여겨집니다. 본격적인 관직 생활은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좌랑, 이어 예조좌랑이 되면서 시작되었어요.
이이가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로 지낸 일은 무엇인가요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그 후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했습니다. 1년 만에 하산해 환속했는데, 1555년 스무 살 때의 일이에요 (위키백과).
다만 어머니를 여읜 정확한 나이는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 안에서도 도입부는 15세, 생애 서술은 16세로 다르게 적어 내부 불일치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 1년의 불교 수행 경력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됩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학자의 탈을 쓴 승려'라는 비난이 여기서 나왔어요.
기발이승일도설이 무슨 뜻인가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 실제로 움직이고 발동하는 것은 기(氣)이고 이(理)는 거기에 올라타 있을 뿐이어서, 길은 하나라는 주장입니다. 이이는 이 주장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 곧 사단칠정론을 비판했어요 (위키백과).
노래에 빗대면 감이 옵니다. 곡조는 목소리 없이는 결코 들리지 않고, 목소리는 언제나 어떤 곡조를 실은 채로만 나옵니다. 이이가 본 이와 기의 관계가 그랬어요. 이와 기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지 않고 선후도 없이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다만 이 대비를 너무 단순하게 밀고 나가면 곤란합니다. 흔히 이황은 이기이원론, 이이는 이기일원론이라고 짝지어 외우지만,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둘 다 이일원론 또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이와 이황은 사이가 나빴나요
이이와 이황이 서로 적대했다는 인상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에 가깝습니다. 이이는 스물세 살이던 1558년에 안동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직접 찾아가 이틀간 머물며 학문을 논했어요 (영어 위키백과).
한국어 위키백과는 두 사람이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고 명시합니다. 오늘날 널리 퍼진 대립 구도는 뒷날 학파와 붕당이 갈라지면서 그 갈등이 두 사람의 관계로 투사된 결과라는 뜻이에요.
동호문답과 만언봉사에는 무엇을 썼나요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이이가 임금에게 직접 올린 정치 개혁 문서입니다. 1569년 음력 9월에 지어 선조에게 올린 동호문답은 정치 개혁을 논한 11개조의 글이고, 1573년에 올린 만언봉사는 조선 정치와 사회의 잘못된 점 일곱 가지를 짚고 그 개선책을 제시한 상소문이에요 (위키백과).
다만 동호문답의 저작 경위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이가 34세에 단독으로 저술했다고 설명하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1569년에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고 서술해 세부 정황이 엇갈려요.
인재를 어떻게 쓸 것이냐는 물음에 이이가 내놓은 답은 그의 현실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은 어떤 책인가요
《성학집요(聖學輯要)》는 1581년에 저술해 펴낸 임금을 위한 학문서이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은 1577년 황해도 해주 석담에 은거하던 시기에 쓴 아동교육서입니다 (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성학집요를 받아본 선조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이이가 공부를 어떻게 봤는지는 자경문(自警文)의 한 대목에 압축돼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이 실천에 있다는 이 문장은 그의 학문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이는 관직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이이는 학자로만 산 사람이 아니라 실무와 국방을 맡은 관료였습니다. 1568년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한 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어요 (위키백과).
1583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서얼허통을 주장했는데, 서얼이라도 전공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내용이었어요. 이 주장은 양반들의 반대로 좌절되었습니다.
또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다만 이 설의 사실 여부는 논쟁적이라, 아래 오해 항목에서 따로 다룹니다.
이이는 어떻게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어떤 평가를 받았나요
이이는 1583년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1584년 음력 1월 16일 한성부 대사동 자택에서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의 책들과 부싯돌 몇 개뿐이었어요 (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사후에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파주 자운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부인 곡산(교하) 노씨와 하녀 한 사람이 그의 묘소를 지키다 왜군에 저항하여 자결했는데, 시신이 구분되지 않아 묘소 앞에 함께 묻혔어요.
문묘 종사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이와 성혼 등의 문묘 종사는 인조반정 이후 약 50년간 논쟁의 대상이었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반대 논거로는 허목의 이런 비판이 있었어요.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정적이 쓴 정치적 비판문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이의 위상은 두 가지로 확인됩니다. 1972년부터 대한민국 5천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고, 파주 이이 유적(坡州 李珥 遺跡)은 2013년 2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었어요.
화석정에 불을 붙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화석정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된 기록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지는 일화입니다. 이이가 임진강 나루터 근처에 정자를 짓고 후손들에게 왕이 북으로 피난할 때 불을 붙여 길을 밝히라 일렀다는 이야기예요 (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화석정이 불타 그 불빛으로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합니다. 다만 자료가 이를 전설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사실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합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들
통념: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
실제로는 사실 여부가 논쟁적입니다. 이이의 현존 상소문과 문집에는 '양병'은 나오지만 '십만양병'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군축을 주장한 글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요. 이 설은 후대에 세워진 이이 기림 비문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어, 후대 유학자들이 그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덧붙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위키백과).
통념: 이이는 '학자의 탈을 쓴 승려'였다.
실제로는 정치적 공격에 가깝습니다. 이 비판은 허목과 윤휴 등 근기남인이 이이의 문묘종사를 막기 위해 제기한 것으로, 청년기 약 1년간의 불교 수행 경력을 근거로 삼았어요.
통념: 이황과 이이는 서로 대립한 앙숙이었다.
실제로는 후대 학파와 붕당의 대립이 두 사람 관계로 옮겨간 것입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고 명시하고, 이이는 스물세 살에 직접 도산으로 찾아가 이틀간 학문을 논했습니다.
통념: 이황은 이기이원론, 이이는 이기일원론으로 깔끔하게 갈린다.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둘 다 이일원론 또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해요.
통념: 동호문답의 저술 경위는 명확하다.
실제로는 자료가 엇갈립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34세에 단독 저술했다고 설명하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1569년에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고 서술해 세부 정황에 차이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이의 별칭 구도장원공은 무슨 뜻인가요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했다는 뜻입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했고, 23세 때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에서 장원했어요.
기발이승일도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요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이는 그 위에 올라타 있을 뿐이므로 길은 하나라는 주장입니다. 이이는 이와 기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이이의 대표 저작은 무엇인가요
1569년의 《동호문답(東湖問答)》, 1573년의 《만언봉사(萬言封事)》, 1577년의 《격몽요결(擊蒙要訣)》, 1581년의 《성학집요(聖學輯要)》입니다. 정치 개혁 상소부터 아동 교육서까지 폭이 넓어요.
이이가 5천원권 지폐에 실린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1972년부터입니다. 또한 파주 이이 유적은 2013년 2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이는 몇 살에 세상을 떠났나요
1584년에 마흔아홉의 나이로 한성부 대사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긴 재산은 서재의 책들과 부싯돌 몇 개뿐이었어요.
정리
이이를 읽을 때 붙잡을 실마리는 두 가닥입니다. 하나는 이와 기를 갈라놓지 않은 기발이승일도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각이 곧바로 상소문과 교과서로 흘러나갔다는 사실이에요. 동호문답의 열한 개 조목, 만언봉사의 일곱 가지 지적, 아이들을 위해 쓴 격몽요결이 같은 사람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후대가 덧입힌 것이기도 합니다. 10만 양병설도, 화석정에 불을 붙였다는 일화도, 이황과의 앙숙 구도도 그렇습니다. 문묘 종사가 인조반정 뒤 오십 년을 끌었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 있던 시절부터 이미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줘요.
마흔아홉에 남긴 것은 서재의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습니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