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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학교에서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봤을 거예요. "과학은 따지는 거고 종교는 믿는 거니까, 둘은 서로 반대 아니야?"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죠. 한쪽이 맞으면 다른 쪽은 틀려야 할 것만 같고요.
그런데 약 800년 전, 지금의 이란 땅에 이 생각을 정면으로 의심한 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따지는 머리와 믿는 마음이 왜 꼭 싸워야 하지? 둘 다 진리를 향하는 길이라면 손을 잡을 수도 있잖아"라고 물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시르 알딘 투시예요.

투시는 1201년부터 1274년까지, 일흔셋 해를 산 페르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이란 지역 학자예요. 이름 끝의 '투시'는 그가 태어난 도시 '투스'에서 따온 거예요. 우리로 치면 고향이 이름에 붙은 셈이죠.
그는 한 가지만 잘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별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천문학,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윤리학, 말이 앞뒤가 맞는지 살피는 논리학까지 두루 다뤘어요. 한 사람이 수학자이면서 도덕 선생님이면서 천문대 관장이었던 셈이에요. 게다가 그가 산 시대는 몽골 군대가 온 도시를 휩쓸고 다니던 어지러운 때였어요. 그런 난리 속에서도 그는 책과 별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투시의 핵심 주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두 단어를 풀어야 해요.
'이성'은 머리로 따져서 아는 거예요. "1 더하기 1은 2"처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곰곰이 생각하면 닿는 앎이죠. '계시'는 믿음의 경전이 알려 주는 거예요. 직접 계산해서 아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받은 지도 같은 거예요.
당시 많은 사람은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여겼어요. 철학을 좋아하면 신앙이 흔들리고, 신앙을 지키려면 따지기를 멈춰야 한다고요. 투시는 여기에 고개를 저었어요. 어두운 방을 비출 때 손전등 두 개를 다 켜면 더 잘 보이지, 굳이 하나를 꺼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투시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따지는 방법과 이슬람 신앙의 가르침을 한자리에 놓고 비교했어요. 어느 한쪽을 버리는 게 아니라, 서로 어긋나 보이는 부분을 차근차근 맞춰 본 거예요.
예를 들어 그의 윤리학 책 '나시르 윤리학'은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다뤄요. 여기서 그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도 쓰고 이슬람의 가르침도 함께 써요. 요리할 때 칼과 불을 둘 다 쓰는 것처럼요. 도구가 둘이라고 음식이 두 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진리라는 한 그릇을 차리는 데 둘 다 필요하다고 본 거예요.

투시는 책상 앞에만 있던 사람이 아니에요. 1259년에는 지금의 이란 북서쪽 마라게라는 곳에 큰 천문대를 세웠어요. 그는 몽골 지배자의 후원을 받아, 그때까지 쌓인 별 관측 기록을 정리하고 새로운 별표를 만들었어요. 어제의 정복자에게 학문의 값어치를 설득해 도서관과 관측 도구를 얻어 낸 거예요.
특히 그는 옛 그리스 천문학의 어색한 부분을 고치려고 '투시 쌍'이라는 기발한 도형 장치를 생각해 냈어요. 원 두 개를 맞물려 돌리면 한 점이 똑바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방법이죠. 훗날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쓴 생각과 닮았을 만큼 앞선 발상이었어요. 그에게 별을 정확히 아는 일과 신을 깊이 생각하는 일은 따로가 아니었어요.

투시는 따지는 머리와 믿는 마음을 원수가 아니라 동료로 봤어요. 이성은 머리로 닿는 앎, 계시는 위에서 받은 지도. 그는 둘 중 하나를 끄는 대신 손전등 두 개를 함께 켜서, 윤리학과 논리학과 천문학을 한 사람 안에 묶어 냈어요. 800년 전 한 학자가 보여 준 이 태도는, 무언가를 진짜 알고 싶을 때 한쪽 눈만 뜨지 말라는 조용한 권유처럼 들려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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