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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넓은 풀밭에 소 백 마리가 흩어져 있다고 해볼게요. 얼룩소도 있고, 새까만 소도 있고, 뿔이 큰 소, 이제 막 태어난 송아지도 있어요. 크기도 색도 무늬도 제각각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이 백 마리를 전부 그냥 "소"라고 불러요. 길을 가다 처음 보는 소를 만나도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아, 소네" 하고 알아봐요.
여기서 조금 이상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볼게요. 생김새가 다 다른데,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다 같은 소"라고 하는 걸까요? 소들이 정말로 똑같이 나눠 가진 '소다움' 같은 게 세상에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그냥 우리 머릿속에서 비슷한 것끼리 묶는 버릇일 뿐일까요?
천 년 전 인도에서, 바로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진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우다야나예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10세기 무렵 인도 동북부 미틸라 지역에서 활동한 철학자죠. 그는 '냐야'와 '바이셰시카'라고 불리는 두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이 사람들을 한마디로 소개하면 "세상은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진짜로 거기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들이었어요. 따지기를 좋아하고, 논리를 한 칸 한 칸 밟아 올라가는 걸 즐긴 학파였죠.
우다야나가 평생 매달린 큰 물음 가운데 하나가 이거였어요. "서로 다른 여럿이 '같은 종류'로 묶일 때, 그 공통점은 진짜로 존재하는가?" 철학에서는 이 공통점을 '보편자'라고 불러요. '소다움', '빨강', '사람임' 같은 것들이요. 눈에 보이는 소 한 마리가 아니라, 모든 소가 함께 나눠 가진 그 무언가 말이에요.

그런데 같은 시대에,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주로 불교 쪽 철학자들이었죠.
그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소다움' 같은 진짜 공통점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에 실제로 있는 건 낱낱의 개별 소들뿐이다." 그럼 우리는 왜 그걸 다 "소"라고 부르냐고요? 그들의 대답이 꽤 재미있어요. "그건 그것들이 '소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지만 속에 핵심이 있어요. 우리는 말이나 코끼리나 돌멩이 같은 '소가 아닌 것'을 하나씩 빼고, 남은 것을 "소"라고 묶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통점을 보는 게 아니라, 아닌 것을 빼는 머릿속 작업이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빨래 더미에서 "양말이 아닌 것"을 전부 골라내면 셔츠만 남죠. 그렇다고 셔츠들이 공유하는 '셔츠다움'이 진짜 있어서 남은 건 아니에요. 아닌 걸 빼다 보니 그냥 묶인 거죠. 불교 쪽 설명이 딱 이런 식이었어요.

우다야나는 이 설명이 영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되물어요. "처음 보는 소를 보고도 곧장 '소다!' 하고 알아보는 건 그럼 어떻게 설명할 건데?"
생각해 보면, 빼기로만 묶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가 아닌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어야 해요. 말도, 양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까지 전부요. 그건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난생처음 보는 소를 단 한 번 보고 곧바로 알아봐요. 우다야나는 말합니다. 그게 가능한 건 소들이 진짜로 똑같이 나눠 가진 무언가, 곧 '소다움'을 우리가 직접 알아보기 때문이라고요. 그 공통점은 머릿속 버릇이 아니라, 소 한 마리 한 마리 안에 실제로 깃들어 있는 진짜 존재라는 거예요.
말하자면 '소다움'은 똑같은 도장이 여러 장의 종이에 찍힌 것과 비슷해요. 종이는 장마다 달라도, 거기 찍힌 도장 무늬는 하나의 같은 것이잖아요. 우다야나에게 보편자가 딱 그랬어요.

여기서 우다야나가 똑똑했던 지점이 나와요. 그는 "공통점은 다 진짜다"라고 무작정 우기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럴 때는 진짜 보편자로 쳐 줄 수 없다"는 규칙들을 따로 정해 뒀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어떤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세상에 딱 하나뿐이라면, 거기엔 공통점이랄 게 없어요. 공통점이란 여럿이 나눠 가질 때만 말이 되니까요. 또 두 낱말이 정확히 똑같은 것들만 가리킨다면, 그건 서로 다른 두 개의 보편자가 아니라 사실 하나예요. '보편자의 보편자, 그 보편자의 보편자' 하고 끝없이 위로 쌓아 올리는 것도 막아 뒀고요.
이렇게 우다야나는 보편자를 아무렇게나 늘리지 않고, 진짜와 가짜를 걸러 내는 체를 촘촘하게 만들어 뒀어요. 덕분에 그의 실재론은 "세상엔 공통점이 넘쳐난다"는 헐렁한 주장이 아니라, 꼼꼼히 걸러 낸 단단한 주장이 될 수 있었죠.

이 말싸움은 사실 "세상에는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진짜 질서가 있는가"라는 아주 큰 질문이에요. 보편자가 진짜로 있다면, 우리가 사물을 종류별로 나누는 일은 마음대로 지어내는 게 아니라 세상에 이미 새겨진 결을 따라 읽어 내는 일이 돼요. 과학이든 일상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거기에 놓이는 거죠.
우다야나는 이 실재론을 발판으로 삼아, 영혼이 진짜 있다는 것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도 차근차근 논증해 나갔어요. 보편자가 진짜라는 주장은 그가 세운 큰 건물의 주춧돌 같은 것이었어요.

생김새가 다 다른 소들을 우리가 망설임 없이 "소"라고 부를 때, 거기엔 소들이 실제로 나눠 가진 '소다움'이 있다, 이게 우다야나가 천 년 전에 지키려 한 생각이에요. 맞은편 불교는 그런 공통점은 없고 '아닌 것 빼기'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는 처음 본 소도 단번에 알아보는 우리의 능력을 들어 공통점은 진짜라고 맞섰죠. 그러면서도 아무 말이나 보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까다로운 규칙까지 세워 뒀고요. 다음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아지나 사과를 단번에 알아보게 될 때, 그 '알아봄'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러면 천 년 전 우다야나의 고민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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