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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여러분이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걸 떠올려 보세요. 스마트폰일 수도 있고, 따뜻한 이불일 수도 있어요. 이제 그걸 전부 내려놓는 장면을 그려 보세요. 집도, 옷도, 신발도, 내일 먹을 밥 한 끼까지요. 약 2,600년 전에 진짜로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도 거지가 아니라 왕자가요.
기원전 599년, 인도 동북부의 작은 왕국에서 바르다마나라는 아기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부족의 족장, 어머니는 왕가의 공주였죠. 비단옷을 입고 보석으로 꾸민 방에서 잠들고, 하인들이 부채질을 해 주는 삶이었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는 생활이었죠.
그런데 이 왕자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궁 밖으로 나갈 때마다 죽어 가는 동물, 늙고 병든 사람, 누군가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작은 벌레를 봤거든요. 모든 생명이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어느 밤, 그는 비단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보석을 풀고, 맨발로 궁문을 나섰어요. 향한 곳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숲이었어요. 사람들은 그를 '마하비라', 곧 '위대한 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가 싸운 상대는 적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어요.

궁을 떠난 마하비라의 삶은 영화 속 고행 장면을 훌쩍 넘어서요. 그는 옷을 입지 않았어요. 한겨울 바람이 불어도 맨몸이었죠. 신발도 신지 않고 인도의 먼지 길과 가시밭길을 12년 동안 맨발로 걸었어요. 집이 없으니 매일 밤 나무 아래에서 잤고, 음식은 오직 구걸로만 얻었어요. 그마저도 남이 먹다 남긴 것만 받았고,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만 먹었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어요. 마하비라는 걸을 때 작은 빗자루로 자기 앞의 땅을 쓸면서 걸었어요. 개미 한 마리라도 밟지 않으려고요. 물을 마실 때는 천으로 걸러서 마셨는데, 물속에 사는 눈에 안 보이는 작은 생명까지 해치지 않으려는 거였어요. 밤에는 불도 켜지 않았어요. 불빛에 날아든 벌레가 타 죽을까 봐요.
이게 바로 마하비라의 핵심 생각인 '아힘사', 비폭력이에요. 아힘사는 그냥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수준이 아니에요. 보이든 안 보이든, 크든 작든, 어떤 생명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무심코 내딛는 한 걸음이 누군가의 세계를 부수는 일일 수 있다는 것. 그는 그걸 온몸으로 보여 줬어요.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우리가 잘 아는 붓다, 싯다르타 고타마와 마하비라는 같은 시대, 같은 지역 사람이었어요. 둘 다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에서 태어났고, 둘 다 왕족이었고, 둘 다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아 떠났어요. 마치 같은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 두 명인 것 같죠.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어요. 붓다는 '극단을 피하라'고 했어요. 지나친 쾌락도, 지나친 고행도 답이 아니라며 중도를 가르쳤죠.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되 집착하지 말라는 거예요. 반면 마하비라는 극단을 향해 끝까지 걸어갔어요. 옷을 입는 것조차 집착이라고 봤고, 무언가를 가진다는 건 다른 생명에게서 빼앗는 일이라 여겼어요.
붓다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면, 마하비라는 '어떤 생명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는 길'을 찾은 거예요.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 완전히 다른 답에 닿은 두 사람. 붓다의 가르침은 불교가 되었고, 마하비라의 가르침은 자이나교가 되었어요. 재미있는 건, 불교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쇠퇴했고, 자이나교는 인도 밖으로는 거의 안 나갔지만 인도 안에서 2,600년을 꿋꿋이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오늘날에도 인도에는 자이나교 신자가 약 400만에서 500만 명 있어요. 그리고 이들의 일상은 상상보다 훨씬 놀라워요. 코로나로 너 나 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기 한참 전부터, 그것도 2,600년 전부터 입을 가려 온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거든요. 자이나교 승려들은 입 앞에 '무흐파티'라는 흰 천을 달고 다녀요. 감염 예방이 아니라, 숨 쉴 때 공기 중의 작은 생명이 입속으로 들어와 죽는 걸 막기 위해서예요.
놀라운 건 이뿐이 아니에요. 자이나교 신자 대부분은 농사를 짓지 않아요. 밭을 갈면 흙 속 벌레가 죽으니까요. 그래서 땅을 파지 않아도 되는 상업과 금융업을 택해 왔어요. 인도에서 자이나교도는 전체 인구의 0.4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보석 거래나 은행업,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보다 훨씬 커요. 개미를 밟지 않으려는 믿음이 독특한 경제 구조까지 만든 셈이죠.
음식도 특별해요. 철저한 채식은 기본이고, 감자나 양파, 마늘처럼 땅속에서 자라는 채소도 안 먹는 경우가 많아요. 뿌리를 뽑으면 흙 속 미생물이 죽으니까요. 해가 진 뒤엔 식사도 안 해요. 어둠 속에서 음식에 앉은 벌레를 못 보고 먹을 수 있어서요.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싶죠. 맞아요, 극단적이에요. 하지만 맨몸으로 숲에 들어간 왕자의 신념이 지금도 수백만 명의 밥상과 직업과 걸음걸이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랍지 않나요.
이제 이 이야기를 우리 시대로 가져와 볼게요. 요즘 뉴스엔 동물권, 비건, 환경운동 같은 말이 자주 나와요.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화장품 동물실험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죠. 그 밑바닥에 깔린 질문은 하나예요.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을까?' 마하비라는 2,600년 전에 이미 답했어요. 개미에게도, 물속 미생물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고요.
물론 그의 방식을 지금 그대로 따르긴 어려워요. 맨발로 출근할 수도 없고, 빗자루로 지하철 바닥을 쓸며 다닐 수도 없죠. 하지만 그가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방법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에요. 우리는 보통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봐요. 내 일상이 편하면 그만이라고요. 마하비라는 이걸 뒤집었어요. 네가 밟으려는 그 개미도 너만큼 살고 싶어한다고, 세상은 네 것이 아니라 너는 수많은 생명 중 하나일 뿐이라고요.
실제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도 자이나교의 아힘사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어요. 간디가 자란 구자라트 지역엔 자이나교도가 많았고, 어릴 때부터 그 정신을 자연스럽게 접했거든요. 간디가 총 대신 침묵과 단식을 무기로 든 그 뿌리에 마하비라가 있었던 거예요.
마하비라는 황금 침대를 버리고 맨발로 숲에 들어간 왕자였어요. 그가 빗자루로 땅을 쓸고 천으로 물을 거른 건,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까지 해치지 않으려는 '아힘사', 곧 비폭력 때문이었죠. 같은 시대 붓다가 극단을 피하는 중도를 택했다면, 마하비라는 극단까지 걸어가 어떤 생명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는 길을 찾았고, 그 가르침이 자이나교가 되었어요. 오늘날 수백만 명의 밥상과 직업,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까지 그의 신념이 닿아 있어요. 결국 그가 남긴 건 빗자루 한 자루가 아니라, 밟기 전에 한 번만 내려다보라는 시선이었어요. 그 한 번의 시선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고요? 2,600년의 역사가 그렇다고 답하고 있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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