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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지금부터 500년쯤 전, 인도 북서쪽 펀자브 지방을 떠올려 볼게요. 그곳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등급이 정해져 있던 사회였어요. 신분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과 같은 그릇으로 밥을 먹지 않았고, 옷깃이 스치는 것조차 꺼렸죠.
그런데 한 사람이 좀 이상한 식당을 열었어요. 신분이 높든 낮든, 부자든 거지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바닥에 한 줄로 나란히 앉아 똑같은 밥을 먹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죠. 이 식당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구루 나나크예요. 그리고 이 식당은 지금도 살아 있어서, 인도의 황금 사원에서는 하루에 수만 명이 신분을 묻지 않고 공짜 밥을 먹어요.

구루 나나크는 1469년부터 1539년까지 살았던 인도의 사상가예요. '구루'는 우리말로 '스승'이라는 뜻이고요. 그는 시크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처음 연 사람이에요.
그의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줄일 수 있어요. 첫째, 부지런히 정직하게 일해서 제 손으로 벌어먹을 것. 둘째, 늘 신을 마음에 새길 것. 셋째, 번 것을 혼자 쥐지 말고 남과 나눌 것. 일과 믿음과 나눔, 이 셋을 한 묶음으로 본 거예요. 그래서 기도만 하고 일은 안 하는 사람도, 혼자만 배불리 사는 사람도 그의 눈에는 반쪽짜리였죠.

그 시절 인도에는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가 단단히 박혀 있었어요.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로 평생 직업과 자리가 정해지는, 말하자면 태어나는 순간 번호표를 받고 그 번호를 죽을 때까지 못 바꾸는 사회였죠.
나나크는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어요. 신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똑같다고 했죠. 그가 식당에서 모두를 한 줄로 앉힌 것도, 말로만 평등을 외치지 않고 밥상에서 몸으로 보여 준 거예요. 여기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매일 끼니마다 증명한 셈이죠.

자,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져요. 나나크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어요. 보통 같으면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겠죠. 그런데 그는 아들이 아니라, 자기를 오래 따르며 정성을 다한 제자 한 명을 다음 스승으로 골랐어요. 그 제자가 바로 2대 구루 앙가드예요.
회사로 치면 창업자가 아들 대신 가장 헌신적인 직원에게 회사를 넘긴 셈이에요. 평등을 가르친 사람다운 선택이었죠. 핏줄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로 뒤를 잇게 한 거니까요. 그다음 3대 스승 자리도 아들이 아니라 나이 든 제자에게 돌아갔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묘한 일이 생겨요. 4대 스승은 3대 스승의 사위가 되었고, 5대 스승부터는 아예 그 집안 아들에게 자리가 대물림되기 시작했어요. 평등을 외치며 핏줄을 뛰어넘었던 그 자리가, 몇 대 지나자 한 집안의 가업처럼 굳어 버린 거예요.
시크교의 스승은 나나크부터 10대까지 이어졌는데, 그 기간이 1469년부터 1708년까지 약 240년이에요. 그 절반쯤 지난 뒤부터는 스승 자리가 사실상 세습이 된 거죠. 평등을 설파한 창시자가 떠난 뒤 정작 지도부는 세습으로 굳어 버린 역설, 바로 이 대목이에요.

조금 김이 빠질 수도 있는데, 사실 이건 꽤 흔한 일이에요. 처음에는 뜻과 사람됨으로 뽑던 자리도, 공동체가 커지고 위험해지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거든요. 그리고 가장 믿기 쉬운 건 결국 한솥밥 먹는 가족이죠. 당시 시크교는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바깥의 탄압도 받았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자리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을 거예요.
재미있는 건 마지막 장면이에요. 10대 스승 고빈드 싱은 1708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 사람을 다음 스승으로 세우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신 그동안 쌓인 가르침을 모은 경전 그 자체를 영원한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죠.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펼쳐 읽을 수 있는 책이 스승이 된 거예요. 핏줄로 좁아졌던 자리가 끝에 가서는 다시 모두에게 열린 셈이죠.

구루 나나크는 모두가 한 식탁에서 같은 밥을 먹는 평등을 가르쳤고, 자기 자리도 아들이 아닌 제자에게 넘겼어요. 하지만 공동체가 커지고 위험해지자 그 자리는 결국 한 집안의 세습으로 굳었죠. 좋은 뜻으로 시작한 자리도 시간이 지나면 핏줄을 따라가기 쉽다는 걸, 시크교의 첫 240년이 보여 줘요. 그래도 마지막에 그 자리를 한 권의 책에 넘겨 다시 모두에게 연 것을 보면, 나나크가 처음 차린 그 평등의 식탁은 끝내 사라지지 않은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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