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예수처럼 모시려던 캉유웨이, 그 운동은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교과서 속 공자가 갑자기 '종교'가 된다면
공자 하면 보통 옛날 중국의 점잖은 선생님이 떠올라요. 제자들에게 예의와 어짊을 가르친 분이죠. 그런데 지금부터 120년쯤 전, 이 공자를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종교의 창시자'로 모시자고 외친 사람이 있었어요. 공자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공자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달력을 새로 세고, 일요일에 교회 가듯 사람들이 모여 공자를 받들게 하자는 거였죠. 그 사람이 바로 캉유웨이예요. 도대체 왜 멀쩡한 선생님을 종교로 만들려고 했을까요.
무너지는 나라를 본 학자, 캉유웨이
캉유웨이는 1858년에 태어나 1927년까지 살았어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서양 나라들과 일본에게 전쟁마다 지고,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기던 시절이었죠. 똑똑한 젊은 학자였던 그는 가만히 책만 읽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1898년, 그는 황제를 설득해 나라를 통째로 뜯어고치는 개혁에 나서요. 황제 한 사람이 모든 걸 마음대로 하는 대신, 법과 의회가 권력을 나눠 갖는 '입헌군주제'로 바꾸자고 했죠. 하지만 이 개혁은 100일 만에 힘 있는 어른들에게 짓밟히고, 캉유웨이는 외국으로 도망쳐야 했어요.
서양은 왜 강할까, 그가 찾은 답
망명지에서 그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서양 나라들은 왜 저렇게 단단할까. 그가 보기에 그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종교, 바로 기독교가 있었던 거예요. 학교로 치면 모두가 함께 부르는 교가나 다 같이 지키는 약속 같은 거죠. 그런 게 있으면 수천만 명이 흩어지지 않고 같은 방향을 보게 돼요. 그런데 중국에는 그런 '마음의 중심'이 흐릿했어요. 그래서 캉유웨이는 생각했죠. 우리에게도 이미 있잖아, 공자라는 거대한 뿌리가. 이걸 제대로 된 종교처럼 세우면 나라가 다시 하나로 묶이겠다고요.
공자는 사실 '개혁가'였다는 주장
여기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어요. 보통 공자는 옛날을 그리워하며 '옛것을 지키자'고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러면 개혁과는 안 맞잖아요. 그래서 캉유웨이는 책을 써서 색다른 주장을 펼쳐요. 공자는 사실 낡은 걸 지키려 한 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제도를 새로 설계한 '개혁가'였다는 거예요. 옛 성인의 이름을 빌렸을 뿐, 속마음은 미래를 향했다는 거죠. 이 주장이 맞다면 개혁은 공자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자의 진짜 뜻을 잇는 일이 돼요. 캉유웨이는 이렇게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겼어요.
모두가 한 식구가 되는 세상, 대동
캉유웨이에게는 더 큰 꿈도 있었어요. 그는 '대동서'라는 책에서 아주 먼 미래의 이상 세계를 그렸어요. 대동은 '크게 하나 됨'이라는 뜻이에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도,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담장도, 내 가족 남의 가족이라는 구별마저 허물어진 세상이죠. 모두가 한 식구처럼 평등하게 사는 그림이었어요. 오늘로 치면 '온 지구가 한 마을'이라는 상상에 가까워요. 공자교를 세우려던 그의 운동은 바로 이 큰 꿈으로 가는 첫 단추 같은 거였어요.
끝내 종교가 되지 못한 이유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선 뒤, 캉유웨이와 제자들은 공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자교를 아예 나라의 공식 종교로 헌법에 못 박으려 했어요.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있었죠.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은 '공자를 떠받드는 건 낡은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대했어요. 개인의 자유와 과학을 중요하게 여기던 이들에게, 나라가 정해 주는 종교는 답답한 족쇄처럼 보였거든요. 결국 공자교 국교화 운동은 헌법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공자는 끝내 '국가 종교'가 되지 않았어요.
정리
캉유웨이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다시 묶을 끈을 찾다가, 서양의 기독교 자리에 공자를 놓으려 했어요. 그래서 공자를 개혁가로 다시 읽고, 공자교를 나라의 종교로 세우려 했죠. 그 바탕에는 온 세상이 한 식구가 되는 '대동'의 꿈이 있었어요. 비록 이 운동은 시대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전통을 버리지 않고 새 시대에 맞게 되살리려 한 그의 고민은 지금도 곱씹어 볼 만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