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염무가 청 관직을 자결로 거절한 날
고염무의 어머니는 단식 15일 만에 죽었다
고염무의 양어머니는 밥을 거부한 지 15일 만에 죽었다.
1645년, 청나라 군대가 양쯔강 남쪽 강남 지역을 점령하던 해였다.
양어머니 왕씨는 그 충격으로 스스로 음식을 끊었다.
15일이다.
굶어 죽기까지 15일 동안 아들 고염무가 곁에 있었다.
왕씨의 마지막 말은 딱 하나였다. "청나라 벼슬은 하지 마라."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다.
회사가 적에게 인수되자 어머니가 단식을 선언하고, 죽으면서 "새 경영진 밑에서는 절대 출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이 유언을 남긴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라 양어머니였다는 게 이 장면의 핵심이다.
왕씨는 고염무를 낳지 않았다.
하지만 고염무는 그 유언을 죽을 때까지, 60년 가까이 지켰다.
친어머니보다 더 깊이 새겨진 약속이 됐다.
고염무는 30년 동안 노새 등에서 학문을 했다
그는 30년간 책상에 앉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고염무는 강남을 등지고 북쪽으로 떠났다.
노새 두 마리에 책을 가득 싣고, 산둥·산시·허베이를 1만 리 이상 발로 누볐다.
오늘날로 치면 종신 교수가 연구실을 버리고 30년간 전국을 돌며 직접 데이터를 수집한 격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책상에 앉아 고전을 외우는 것을 학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고염무는 정반대였다. 현장에 가고, 기록하고, 직접 검증했다.
그 30년의 결과가 두 책이다.
「천하군국이병서」는 전국 군현의 지리·재정·군사 정보를 발로 답사해 정리한 지리 총람이다.
「일지록」은 30년 독서 메모를 모아 엮은 백과사전 같은 저작으로, 한 학자의 평생 탐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두 책이 후대 청나라 학자들에게 "경전을 외울 게 아니라 실제를 증명하라"는 학풍, 즉 고증학의 씨앗이 됐다.
고증학이란 문헌과 현실을 직접 대조하고 검증하는 학문 태도다.
"선생님 말씀이니까"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고염무는 강희제의 부름에 칼을 들이대라 답했다
강희제가 부르자, 65세 노인은 "칼이 목에 들어와도 응시하느니 죽겠다"고 답했다.
1678년,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한족 학자들을 포섭하려 박학홍사과를 열었다.
박학홍사과란 최고급 학자만 응시할 수 있는 특별 시험으로, 통과하면 조정 최고 학술 기관인 한림원 자리가 보장됐다.
청 조정의 고관이었던 사위 서건학이 장인 고염무를 황제에게 추천했다.
정년을 앞둔 학자에게 평생 보장되는 최고 석좌 자리를 제안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65세 고염무의 대답은 짧았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응시하느니 죽겠다."
황제의 호의를 자결로 거절한 노학자의 이야기는 청 조정에 충격이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건이 뒤따랐다.
고염무의 양자가 청나라에 협력하자, 그는 양자와 의절했다.
혈연보다 신념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왕씨의 유언이 아들 한 명을 넘어, 이제 손자 세대에까지 선을 그었다.
고염무에게 청나라 관직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고염무는 천하의 책임을 평민에게 물었다
고염무는 처음으로 평민의 어깨에 나라를 올렸다.
그의 저작 「일지록」에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구분이 등장한다.
망국(亡國)과 망천하(亡天下)다.
망국은 왕조가 바뀌는 것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것, 이건 군주와 신하의 문제다.
하지만 망천하는 다르다. 도덕과 문명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 이건 평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고염무는 이렇게 썼다. "천하의 흥망에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
필부란 벼슬도 없고 지위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정치는 정치인이 한다고 모두가 믿던 시대에, "당신도 책임이 있다"고 평민에게 선언한 것이다.
이 문장은 훗날 양계초가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양계초는 청나라 말기 중국 근대화를 이끈 사상가로, 그가 "天下興亡, 匹夫有責(천하흥망 필부유책)"으로 정리하면서 근대 중국 시민의식의 구호가 됐다.
300년 전 한 학자가 쓴 문장이 근대 국민국가 의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염무는 당시 유행하던 양명학도 비판했다.
양명학이란 "마음속에 이미 진리가 있다"는 철학이다. 쉽게 말하면 "느끼면 안다"는 주장이다.
고염무는 이게 공허한 말잔치라고 봤다.
그래서 그가 강조한 것이 경세치용이다.
경세치용이란 학문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제로 쓸모 있어야 한다는 태도다.
오늘날로 치면, 논문만 쓰는 학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문제를 풀어내는 엔지니어의 태도에 가깝다.
고염무는 그 철학을 책 속에만 두지 않았다.
30년간 노새를 몰고, 황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양자마저 내치면서 살아 있는 몸으로 증명했다.
양어머니의 유언 한 마디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이미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 유언이 그토록 깊이 박힌 것인지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