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 평생 벼슬 거절한 조선 기일원론 철학자
서경덕은 조광조의 천거에도 벼슬을 거부했다
서경덕은 며칠을 굶으면서도 조선 최고 권력자의 추천서를 돌려보냈어요.
1519년, 조광조가 그의 이름을 추천 명단에 올렸어요.
조광조는 당시 사림파의 영수였어요.
사림파는 도덕 정치를 내세우며 조선 개혁을 이끌던 세력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집권 여당 대표가 왕 앞에서 "이 사람을 반드시 등용하라"고 직접 보증을 선 거예요.
서경덕은 거절했어요.
1531년 김안국이 다시 천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 가난했어요.
끼니를 거를 만큼이요.
편안하게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오늘날로 비유하면, 취업도 못 하고 굶고 있는데 대기업 임원 자리를 두 번이나 거절한 셈이에요.
그렇게 평생 단 한 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어요.
서경덕은 18세에 사물 이름을 벽에 붙이고 며칠씩 노려봤다
서경덕에게는 스승도, 가문의 후광도, 따라갈 학파도 없었어요.
조선 시대에 학문으로 이름을 남기려면 보통 두 가지가 필요했어요.
이름난 스승에게 배우거나, 학문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야 했어요.
서경덕은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어요.
그 대신 18세에 《대학(大學)》이라는 책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멈췄어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념이었어요.
쉽게 풀면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공부 방법이에요.
서경덕은 그 말을 글자 그대로 실천했어요.
사물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이고, 며칠씩 그것만 응시했어요.
스마트폰도, 검색창도, 물어볼 스승도 없이 그냥 노려봤어요.
당시 조선 학문은 스승에서 제자로, 계보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서경덕은 골방 한 칸에서 혼자 생각하며 자기만의 학파를 만들었어요.
결국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골방이 하나의 학문 공동체가 됐어요.
서경덕은 이(理)가 아닌 기(氣)가 우주의 본질이라 선언했다
서경덕은 조선 학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은 주장을 써냈어요.
당시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주자(朱子)를 따랐어요.
주자는 12세기 중국의 철학자로, 조선이 건국된 뒤 수백 년간 학문의 표준이 된 인물이에요.
그 핵심 주장이 이(理)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거예요.
이(理)가 뭐냐면, 변하지 않는 원리예요.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도가 있어야 하듯, 만물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원리가 존재한다는 논리예요.
"설계도가 벽돌보다 먼저다"라고 수백 년간 가르쳐온 거예요.
서경덕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어요.
《원이기(原理氣)》와 《이기설(理氣說)》이라는 글에서 전혀 다른 주장을 폈어요.
우주의 본질은 기(氣)라는 거예요.
기(氣)는 만물을 이루는 재료이자 움직임 그 자체예요.
오늘날로 치면 에너지와 물질이 합쳐진 것에 가장 가까워요.
그리고 이(理), 그 변하지 않는 원리는 기(氣)가 만들어낸 질서일 뿐이라고 봤어요.
설계도가 먼저가 아니라, 벽돌이 쌓이면서 비로소 질서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모든 건축가가 설계도가 먼저라고 외칠 때, 혼자 "벽돌이 곧 건축이다"라고 말한 셈이에요.
그 주장은 환영받지 못했어요.
후대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 이황(李滉)은 서경덕의 학설을 "잡박(雜駁)하다"고 비판했어요.
잡박이란 뒤섞여 순수하지 않다는 뜻으로, 학문적으로 격이 떨어진다는 표현이에요.
하지만 이황이 직접 비판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워요.
무시할 만한 주장이었다면 굳이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서경덕은 사후 황진이와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 됐다
서경덕은 죽고 나서 학자가 아니라 개성의 명물이 됐어요.
1546년, 서경덕은 화담(花潭) 옆 초가에서 생을 마쳤어요.
화담은 그가 평생 살며 학문을 닦은 개성의 작은 연못이에요.
그 연못 이름이 그의 호(號)가 됐어요.
죽기 직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개성을 대표하는 세 가지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렀어요.
송도는 개성의 옛 이름이고, 삼절은 세 가지 빼어난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 셋은 명기 황진이, 천하의 박연폭포, 그리고 서경덕이었어요.
황진이는 당대 가장 유명한 기생이자 시인이에요.
박연폭포는 개성에서 가장 장엄한 자연 경관이에요.
그리고 그 사이에 가난한 골방 학자가 있는 거예요.
황진이가 서경덕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황진이가 가까이 다가섰지만 서경덕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해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전설이 붙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건 분명해요.
사림이 비주류로 밀어낸 동안, 민간은 그를 명소처럼 기억했어요.
벼슬도 없고 재산도 없었던 사람이, 결국 폭포와 나란히 묶여 기억됐어요.
그가 평생 거절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를 만든 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