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 호락논쟁의 한 축이 된 조선 성리학자
이간은 같은 스승의 동문과 평생 적이 되었다
한 스승 밑에서 같은 책을 읽은 두 제자가, 평생 서로의 학설을 반박하는 편지로 늙어갔어요.
이간(호 외암, 1677-1727)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예요.
성리학이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이치(理)'와 '기운(氣)'으로 설명하는 철학으로, 당시 조선의 학문과 정치 전반을 떠받치는 사상이었어요.
이간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권상하(호 수암)의 문하에서 공부했어요.
권상하는 조선 성리학의 거목 송시열의 수제자로, 그 학문을 잇는 핵심 인물이었어요.
이간은 권상하 밑에서 공부한 여덟 명의 뛰어난 제자,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명이었어요.
그 여덟 명 중에 한원진(호 남당)이라는 인물도 나란히 있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함께 박사논문을 쓴 두 동기예요.
그런데 졸업 뒤 학회에서 서로를 정반대 입장으로 공개 비판하기 시작한 거예요.
다만 그 싸움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어요.
논쟁의 주제는 단 하나였어요.
"사람의 본성과 짐승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 하나로 두 사람은 1709년경부터 편지를 수십 통씩 주고받으며 평생 화해하지 못했어요.
이간은 짐승에게도 사람과 같은 본성이 있다고 썼다
이간은 짐승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이 다르지 않다고 적었어요.
이건 오늘날에도 꽤 과감한 주장이에요.
그런데 이 주장이 나온 곳은 신분제가 하늘처럼 당연했던 17세기 조선이었어요.
이간이 체계화한 학설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에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심지어 풀과 나무까지도,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같은 이치(理)를 받는다는 주장이에요.
스마트폰에 비유하면, 모든 기기에 동일한 운영체제가 깔려 출고되듯, 모든 존재에게 같은 도덕적 본질이 심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사람과 개는 이렇게 다른가.
이간의 대답은 이랬어요. "본질은 같아요. 다만 그것을 담는 몸과 기질(氣質)이 달라서 차이가 생기는 거예요."
기질이란 타고난 몸의 성질로, 같은 소프트웨어인데 하드웨어 성능이 달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는 논리예요.
그는 이 주장을 「미발변(未發辨)」이라는 글과 한원진에게 보낸 여러 서신에서 정리했어요.
하지만 한원진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한원진은 "사람의 본성과 짐승의 본성은 근본부터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했어요.
두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했냐고 물으면, 당시 기준으로는 이간 쪽이었어요.
신분제 사회에서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는 말은, 양반과 천민 사이의 위계를 뿌리째 흔드는 논리로 읽힐 수 있었으니까요.
스승 권상하는 동문 한원진의 손을 들어줬다
스승은 동문의 손을 들어줬고, 이간은 패배한 학설을 들고 혼자 남았어요.
1716년경, 두 제자의 논쟁을 오래 지켜보던 스승 권상하가 입장을 정리했어요.
그는 한원진의 인물성이론,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다르다는 쪽을 정통으로 인정했어요.
이 판결은 단순한 스승의 의견이 아니었어요. 학파 전체의 공식 판정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이후 충청도 일대를 근거지로 한 한원진 계열의 학자들은 호론(湖論)이라 불리며 정통의 자리를 차지했어요.
반면 이간과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은 방어적 위치에 놓였어요.
학파 내부에서 이간은 공식적으로 패배한 셈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어요.
이간은 자기 학설을 철회하지 않았어요.
자신을 키워준 스승이 "틀렸다"고 판정했는데도, 51세로 사망하는 1727년까지 같은 주장을 이어갔어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논문 심사에서 지도교수가 동기 편을 들어 내 주장을 반려했는데, 그래도 같은 결론으로 책을 마저 쓰고 나가는 연구자의 고집이에요.
이간이 바로 그랬어요.
이간의 학설은 100년 뒤 북학파를 낳았다
스승에게 패배한 학설이, 100년 뒤 조선 지식인들의 출발점이 됐어요.
이간이 죽은 뒤 그의 학설은 서울·경기 지역 노론계 학자들, 특히 김창협과 김원행에게 이어졌어요.
이들이 이간의 논리를 정리해 낙론(洛論)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켰어요.
낙론이란 한양(낙수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학파라는 뜻으로, 충청도 근거지의 호론과 지역적으로도 맞섰어요.
그런데 낙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18세기 후반, 홍대용·박지원·박제가 같은 북학파 지식인들이 낙론의 사유를 받아들였어요.
북학파는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해 조선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개혁적 지식인 그룹이에요.
그 연결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이 홍대용의 「의산문답(毉山問答)」이에요.
가상의 두 인물이 대화하는 형식의 이 글에서, 홍대용은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고 청나라나 서양은 변방"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비판했어요.
그 비판의 철학적 뿌리에는 이간의 논리가 있었어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은 이치를 받았듯, 조선이나 청나라나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생각이요.
살아생전 스승에게 패배한 학설이, 한 세대 뒤에는 조선을 흔든 개혁론의 철학적 근거가 됐어요.
이간은 그걸 알았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