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이 형의 죽음 후 끊은 벼슬길과 실학의 시작
성호 이익은 형 이잠이 곤장에 맞아 죽자 벼슬을 끊었다
형이 죽고 나서 이익은 다시는 한양을 향해 책상을 펴지 않았어요.
1706년, 이익의 형 이잠이 옥에서 죽었어요.
숙종에게 당시 권력을 장악한 노론 외척 김춘택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곤장 17대만에 숨진 거예요.
노론은 당시 조선 정계를 주도하던 정치 세력으로, 왕실 외척과 결탁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어요.
당시 이익은 스물여섯이었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두 가지를 스스로 닫아버렸어요.
과거 시험과 관직이었어요.
조선에서 양반에게 벼슬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어요.
가문의 정체성이자, 세금 면제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통로였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명문대 합격이 당연시되는 집안에서, 형이 시국 비판 후 의문사하자 동생이 입학 자체를 거부하고 시골로 내려가버린 상황과 같아요.
이익은 그 길을 통째로 폐기했어요.
이유를 직접 말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하지만 형이 죽은 직후 안산으로 내려가 다시는 한양을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답을 대신하고 있어요.
이익은 안산 첨성리를 평생 떠나지 않고 성호사설을 썼다
이익이 평생 머문 마을은 한양에서 하루 거리였지만, 그는 그 하루를 끝내 건너지 않았어요.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예요.
한자로 '별을 보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그의 호 '성호(星湖)'도 이 마을 이름에서 나왔어요.
이익은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약 40년에 걸쳐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완성했어요.
하늘과 땅, 동식물, 사회 제도, 경전, 시문까지 5개 분야에 걸쳐 3,000여 항목을 정리한 저작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동네 카페에 40년 앉아서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절반 분량을 혼자 써 내려간 셈이에요.
한 번도 큰 도시로 나가지 않은 시골 학자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방대한 지식 체계를 혼자 만들어낸 거예요.
세상에 나가 자료를 모은 게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책으로 들어왔어요.
이익은 양반에게 영업전을 갈고 노비제를 폐지하라고 했다
이익은 자기가 속한 양반 계급을 '나라를 좀먹는 여섯 좀' 가운데 첫 번째로 적었어요.
그가 「곽우록(藿憂錄)」에서 제안한 것이 한전론(限田論)이에요.
각 집안마다 최소한 먹고살 수 있는 토지인 '영업전'을 정해두고, 그 땅은 절대 팔지 못하게 막자는 거예요.
당시 조선에서는 양반 지주들이 토지를 계속 사들이면서 농민들이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주장이 뒤따랐어요.
이익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문벌, 기교, 승려, 게으름을 묶어 '나라를 좀먹는 6좀'이라고 불렀어요.
양반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했고요.
정규직 임원이 사내 게시판에 '임원직이 회사를 망하게 한다'고 공개 비판한 거나 같아요.
자기 계급을 적으로 지목한 학자.
벼슬을 거부한 사람이었기에, 이 말을 아무 대가 없이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이익의 제자들에서 안정복과 정약용이 나왔다
이익이 평생 벼슬을 거부한 대가는, 그가 죽은 뒤 책 한 권으로 돌아왔어요.
이익의 직제자 중에는 안정복이 있었어요.
그는 조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정리한 「동사강목」을 쓴 학자예요.
또 윤동규와 이병휴는 이익의 글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성호학파'라는 학문 공동체를 형성했어요.
그리고 이들로부터 한 세대 뒤에 정약용이 나왔어요.
이익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스물두 살 무렵 성호사설을 처음 읽고 이렇게 적었어요.
"내가 학문을 알게 된 것은 성호 선생 덕분이다."
평생 안산을 떠나지 않은 시골 학자의 책이, 그가 죽은 뒤 조선 후기 개혁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어요.
이익은 끝내 한양에 가지 않았지만, 결국 한양의 사상이 그에게로 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