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답안지에 소나무를 그린 날
박지원은 과거 답안지에 소나무를 그렸다
박지원은 과거 시험 답안지에 글자 한 자를 쓰지 않았어요.
대신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려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갔어요.
1771년 무렵의 일이에요.
그리고 그는 평생 다시 그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게 얼마나 이상한 선택인지, 오늘날로 치면 이래요.
의대 합격이 거의 보장된 명문가 자제가 수능 시험지에 풍경화를 그리고 나가버린 거예요.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반남 박씨 출신이었어요.
노론은 조선 후기 정치를 좌우한 최대 권력 집단이에요.
부친, 조부, 외가 모두 고위 관료였어요.
양반에게 과거 시험은 선택이 아니었어요.
가문의 의무이자, 평생의 직업 사다리였어요.
그런데 그 사다리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제일 먼저 그 사다리를 걷어찼어요.
왜 그랬는지 박지원은 직접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가 평생 남긴 글을 보면, 시험지 위에 그린 소나무가 그 이유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박지원은 양반이면서 양반을 풍자한 작가다
박지원의 소설 속에서 양반은 빚 때문에 자기 신분증을 평민에게 팔았어요.
그 소설을 쓴 사람도 양반이었어요.
「양반전」은 이런 이야기예요.
빚더미에 올라앉은 양반이 동네 부자 평민에게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양반 신분을 팔아요.
오늘날로 치면, 재벌가 자손이 재벌 갑질을 폭로하는 소설을 직접 써서 베스트셀러를 낸 거예요.
「호질(虎叱)」에서는 더 잔인해요.
호질은 '호랑이가 꾸짖는다'는 뜻인데, 평소에 인의예지를 외치던 유학자가 호랑이 앞에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빌어요.
위선의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허생전」은 또 달라요.
양반이 십 년 글공부를 딱 멈추고 장사를 시작하더니, 엄청난 돈을 벌어요.
박지원이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예요. "공부만 하는 양반이 실제로 뭘 할 줄 아냐?"
그런데 이 소설들을 쓴 박지원 본인이 노론 양반이에요.
자기 계급을 이렇게 정면으로 까는 사람이, 그 계급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겉으로는 양반, 속으로는 양반의 천적이었어요.
박지원은 청나라 벽돌에 감탄한 조선 사절이다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가장 길게 기록한 것은 황제의 궁궐이 아니라 평범한 벽돌집과 똥수레였어요.
1780년, 사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 칠순 축하 사절단장이 되자 박지원은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어요.
그 여행의 기록이 『열하일기』예요.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오랑캐 나라'라 불렀어요.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은 "진짜 중화문명은 이제 우리가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졌거든요.
청나라는 배울 게 없는 나라, 무시해야 할 나라였어요.
그런데 박지원은 달랐어요.
그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했어요.
이용후생은 '도구를 잘 써서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한다'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실용이 먼저라는 거예요.
베이징과 열하를 다니며 그가 기록한 건 벽돌집 쌓는 법, 수레 바퀴 구조, 도로 포장 방식, 심지어 가축 분뇨를 어떻게 처리해서 밭에 쓰는지까지였어요.
"오랑캐의 것이라도 쓸모 있으면 배워야지"가 그의 입장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라이벌 회사를 늘 무시하던 사람이 그 회사 공장 청소 시스템이 더 낫다는 이유만으로 보고서 한 권을 써서 본사에 제출한 거예요.
그는 이상을 보러 간 게 아니라, 벽돌을 보러 갔어요.
그리고 그 벽돌 이야기로 조선을 흔들었어요.
정조는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라 명령했다
조선의 가장 개혁적인 왕이 가장 개혁적인 작가에게 시킨 일은 반성문 쓰기였어요.
1792년,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자유롭고 가벼운 문체를 단속하기 시작했어요.
이걸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고 해요.
정해진 고전 문장 틀에서 벗어난 스타일을 금지하겠다는 운동이에요.
정조는 그 원흉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했어요.
그리고 박지원에게 직접 명령했어요. "바른 문체로 글을 써서 사죄하라."
두 사람이 맞붙은 지점이 정치 노선이 아니라 '문장 스타일'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해요.
정조는 박지원의 자유로운 문체가 유교적 질서를 흔든다고 봤어요.
박지원은 그 문체로 조선 사람들이 외면하던 현실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결국 박지원은 자송문(自訟文)을 제대로 제출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어요.
자송문은 '스스로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글'이에요.
왕에게 정면으로 저항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릎을 꿇은 것도 아닌, 박지원다운 방식이었어요.
그 해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안의현감으로 첫 관직에 나갔어요.
과거를 거부하고 양반을 풍자하던 사람이, 결국 지방 관료가 되어 현실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가 시험장에서 그린 소나무는 무슨 의미였을까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어떤 존재이고 싶다는 선언이었을지도 몰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