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가 황제를 천하의 도적이라 쓴 책
19세 황종희, 조정에서 송곳으로 원수를 찔렀다
1629년 봄, 황궁의 형부 마당에서 19살 청년이 소매에서 송곳을 꺼냈어요.
황종희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심리장에 끌려나온 남자를 향해 걸어갔어요.
그 남자의 이름은 허현순(許顯純).
황종희의 아버지를 옥에서 죽인 고문관이었어요.
아버지 황존소는 동림당 인사였어요.
동림당은 명나라 말기, 부패한 환관 정치에 맞선 청렴파 관료 집단이에요.
그리고 그 환관 집단의 두목 위충현이 보낸 허현순의 고문으로 황존소는 옥중에서 죽었어요.
아들은 형부 마당, 오늘날의 법정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허현순을 직접 만났어요.
법의 이름으로 처벌받기를 기다렸더니, 가해자는 무죄를 주장하며 뻔뻔하게 서 있었고요.
그래서 황종희는 준비한 것을 꺼냈어요.
송곳은 허현순의 몸에 꽂혔어요.
살인미수였어요.
그런데 황종희는 처벌받지 않았어요.
숭정제가 이 사건을 묵인했기 때문이에요.
숭정제는 위충현의 환관 정치에 학을 뗀 황제였고, 청년의 복수를 사적 폭력이 아닌 정의로 읽었어요.
오늘로 치면, 아버지를 죽인 가해자가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순간 유족이 단상으로 뛰어올랐는데 재판장이 눈을 감아버린 격이에요.
이것이 황종희의 시작이었어요.
복수극으로 시작한 인생이, 중국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치 사상가를 만들어냈어요.
황종희는 청의 부름을 평생 여덟 번 거절했다
청이 그를 여덟 번 불렀고, 황종희는 여덟 번 거절했어요.
1644년, 명나라가 무너졌어요.
황종희는 절강성에서 의병 조직 세충영(世忠營)을 꾸려 청에 무장 저항했어요.
세충영은 '세세대대로 충성을 잇는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전쟁은 졌어요.
황종희는 산속으로 숨었고, 이후 50년을 글 쓰고 제자를 가르치며 보냈어요.
그 사이 청의 강희제는 그를 거듭 불렀어요.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라는 특별 과거를 마련해 명나라 유민 지식인들을 회유하려 했고, 명나라 역사를 편찬하는 명사관(明史館)의 자리도 권했어요.
박학홍사과는 1679년 청이 시행한 일종의 특채였어요.
황종희는 전부 거절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자기 아들 황백가와 제자들이 명사 편찬에 참여하는 건 허락한 거예요.
"내 손으로는 청의 녹을 받을 수 없어. 하지만 명의 역사가 청의 손에 왜곡되는 건 더 못 봐."
이것이 그의 계산이었어요.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으면서, 역사만큼은 지키겠다는 것.
회사가 망한 뒤 적대적 인수자가 임원직을 제안하지만 본인은 끝까지 거절하고, 후배만 협상 테이블에 보내는 상황과 같아요.
황종희가 군주를 천하의 가장 큰 해악이라 못박았다
황종희가 1663년 한 문장을 적었어요.
"천자는 천하의 가장 큰 해악이다."
이 문장이 담긴 책이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에요.
제목의 뜻은 '어둠 속에서 새 시대의 부름을 기다린다'는 것이었어요.
황종희는 지금이 어둠의 시대임을 알고 있었어요.
책의 핵심 논리는 이렇게 시작돼요.
"옛날엔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손님이었다.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손님이다."
군주는 원래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인데, 지금의 군주는 천하를 자기 재산으로 여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황종희는 학교를 바꾸자고 제안했어요.
당시 학교는 황제의 말씀을 외우는 곳이었어요.
황종희는 학교를 황제 권력을 비판하는 입법 기관, 여론 기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 주장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숫자로 보면 바로 느껴져요.
프랑스의 루소가 국민 주권을 선언한 사회계약론을 쓴 게 1762년이에요.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그보다 99년 앞섰어요.
영국의 토머스 페인이 왕정을 비판한 상식을 쓴 것이 1776년이니, 황종희보다 113년 늦어요.
군주제가 공기처럼 당연하던 시대에, 황종희는 종이 위에 "왕이 곧 도적이다"라고 박았어요.
오늘로 치면, SNS 욕설이 아니라 헌법을 통째로 다시 쓰자는 책을 직접 출판한 것에 가까워요.
명이대방록은 200년 뒤 혁명가들의 교과서가 됐다
황종희가 죽고 정확히 200년 뒤, 그의 책이 청 황실의 관을 짰어요.
황종희는 살아서 이 책의 독자를 거의 얻지 못했어요.
청 왕조 아래에서 명이대방록은 사실상 금서였고, 자비로 출판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가 공들여 쓴 문장들은 200년 동안 먼지 속에 묻혔어요.
그런데 19세기 말, 누군가가 이 책을 꺼냈어요.
청말 개혁사상가 양계초(梁啟超)와 쑨원 진영이 명이대방록을 발굴해 등사판으로 동지들에게 돌렸어요.
등사판이란 복사기가 없던 시대에 손으로 밀어 찍어낸 복사본이에요.
양계초는 훗날 자신의 글 모음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에 이렇게 회고했어요.
"이 책을 인쇄해 친구들에게 배포한 효과가 폭탄과 같았다."
황종희가 거부했던 청 제국은 결국 1912년 무너졌어요.
그 혁명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가, 황종희가 홀로 써서 아무도 읽지 않았던 그 책이었어요.
그는 독자를 기다렸고, 독자는 200년 뒤에 왔어요.
그리고 독자들은 그 책을 읽고 나서 황제를 끌어내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