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은 무능하다는 책에, 이븐 루시드가 똑같은 제목으로 받아친 이유

800년 전, 책 한 권으로 벌어진 말싸움
여러분, 친구가 "넌 완전히 틀렸어!" 하고 쪽지를 보내면 어떻게 하나요? 보통은 그 자리에서 "아니거든?" 하고 답장을 쓰죠. 그런데 그 답장을 짧은 쪽지가 아니라 두꺼운 책 한 권으로, 그것도 상대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지난 뒤에 쓴 사람이 있어요. 바로 이븐 루시드예요. 1126년부터 1198년까지 살았고, 지금의 스페인 남부, 그때는 이슬람 사람들이 다스리던 코르도바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재판을 맡는 판사이자 환자를 보는 의사였고, 무엇보다 철학을 깊이 사랑한 학자였어요. 그가 되받아친 글은 그냥 흔한 반박이 아니라, 당시 가장 유명하고 힘이 셌던 책 한 권을 정면으로 겨눈 것이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잘 읽어 준 사람
이븐 루시드를 한마디로 소개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설명의 달인"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2천 년도 더 전에 살던 그리스 철학자인데, 그가 남긴 글은 워낙 어려워서 읽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븐 루시드는 그 어려운 글을 한 줄 한 줄 풀어서, "이 문장은 사실 이런 뜻이야" 하고 옆에 설명을 붙였어요. 어려운 교과서 옆에 친절한 해설서를 통째로 한 권 써 준 셈이죠. 그것도 짧게 요약한 것, 중간 길이로 풀어 쓴 것, 아주 자세히 뜯어본 것까지 여러 종류로요. 솜씨가 어찌나 뛰어났는지, 먼 훗날 유럽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그 주석가"라고만 해도 누구를 말하는지 다 알아들었대요.

먼저 날아온 펀치, 철학자는 무능하다
이야기를 100년쯤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이븐 루시드보다 앞서 살던 알가잘리라는 아주 유명한 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철학자들의 무능』이라는 책을 써서 철학자들을 세게 몰아붙였어요. 말의 핵심은 이랬어요. "철학자들이 멀리 그리스에서 건너온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믿음과 어긋나는 결론에 닿고 만다. 그러니 그런 철학은 위태롭다." 이 책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어요. 많은 사람이 "그래, 역시 철학 같은 건 함부로 믿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죠. 한동안은 이 한 권이 논쟁의 승자처럼 보였어요.

같은 제목을 비틀어 되받아치다
바로 여기서 이븐 루시드가 등장해요. 그는 『무능의 무능』이라는 책으로 답했어요. 제목이 좀 웃기죠? "네가 무능하다고 한 그 주장이야말로 허술하다"는 뜻이에요. 친구가 "네 그림 이상해"라고 하니까, 답장 제목을 "네 말이 더 이상해"라고 떡하니 붙인 셈이에요. 그는 알가잘리의 책을 옆에 펴 놓고, 한 대목씩 그대로 옮겨 적은 다음 "여기는 이래서 틀렸고, 저 부분은 너무 성급하다" 하고 조목조목 따졌어요.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라, 차분한 논리로 한 걸음씩 짚어 간 거예요. 마치 시험지를 채점하듯이요.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사실 이븐 루시드의 진짜 목적은 말싸움에서 이기는 게 아니었어요.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믿음과 철학은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니다"였어요. 비유하자면 같은 산꼭대기로 오르는 두 갈래 등산로 같은 거예요. 한쪽은 종교라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이성이라는 길인데, 어느 쪽으로 올라도 결국 같은 진리에 닿는다는 거죠. 그러니 철학을 한다고 믿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해서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일이라고 본 거예요. 그에게 깊이 생각하는 일은 위험한 짓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정작 그를 더 아낀 건 다른 동네였다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어요. 이븐 루시드의 생각은 정작 그가 살던 이슬람 세계에서는 크게 이어지지 못했어요. 대신 그의 책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바다 건너 유럽의 학자들이 열광했죠.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같이 다룰지 고민하던 사람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가 그의 글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했어요. 우리가 서양 스콜라철학이라 부르는 큰 흐름이 자리 잡는 데, 그의 주석과 논리가 깊은 자국을 남긴 거예요. 자기 동네 땅보다 멀리 떨어진 남의 동네에서 더 크고 무성하게 자란 씨앗이었던 셈이죠.
정리
이븐 루시드는 "철학자는 무능하다"고 못 박은 유명한 책에, 같은 제목을 슬쩍 비틀어 조목조목 되받은 사람이에요.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뜻밖에 단순했어요. 믿음과 생각은 적이 아니라, 같은 진리로 가는 두 갈래 길이라는 거죠.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한 논리로 답한 그의 태도는, 정작 자기가 살던 곳보다 먼 유럽 땅에서 더 큰 열매를 맺었어요. 누군가 "그건 생각해 봐야 소용없어"라고 말할 때, 800년도 더 전에 한 학자가 두꺼운 책 한 권으로 "아니, 그래서 생각이 더 필요한 거야"라고 답했다는 사실을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