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리슈난은 왜 세상 모든 종교가 결국 한 가지를 가리킨다고 했을까
같은 하늘을 보면서 왜 이렇게 다르게 기도할까
일요일 아침을 떠올려 볼까요. 누군가는 절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또 누군가는 모스크에서 이마를 바닥에 댑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기도하는 모습은 다 다르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다툼이 생겨요. "그래서 누가 맞는 건데?"
100년쯤 전 인도에도 이 질문을 진지하게 파고든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어느 한쪽 손을 들어 주는 대신, 조금 엉뚱한 답을 내놓습니다. "다들 같은 걸 보고 있는데, 부르는 이름만 다른 거예요."
철학을 가르치다 대통령이 된 사람
그 사람은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이에요. 1888년 인도 남부에서 태어나 1975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평생 철학을 가르친 교수였는데,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은 첫 인도 사람이기도 했죠.
재미있는 건 이 학자가 나중에 인도의 두 번째 대통령(1962년부터 1967년까지)이 됐다는 거예요. 지금도 인도에서는 그의 생일인 9월 5일을 '스승의 날'로 기념해요. 한 사람이 교실과 대통령궁을 오간 셈이죠.
그가 평생 붙들고 씨름한 질문이 바로 그거였어요. 세상에 종교가 이렇게 많은데, 이게 다 따로 노는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만날까.
설탕이 달다는 걸 아는 방법
라다크리슈난의 답을 이해하려면 설탕을 떠올리면 쉬워요. 설탕이 달다는 걸 어떻게 알까요? 백과사전에서 '설탕은 단맛이 난다'는 문장을 읽어서? 아니죠. 혀에 한 번 올려 봐야 알아요. 직접 맛본 사람한테는 더 설명이 필요 없고요.
그는 종교의 진짜 알맹이도 이런 거라고 봤어요. 교리나 경전의 문장이 아니라, 뭔가 큰 것과 직접 맞닿는 체험이요. 인도 말로는 이걸 '아누바바'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직접 겪는 체험에 가까워요. 기도하다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 거대한 무언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그런 직접 경험이 먼저고 말로 된 설명은 나중이라는 거죠.
그러니 종교가 다르다는 건 맛본 단맛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맛을 풀어 쓴 문장이 다른 거예요. 누구는 한국어로, 누구는 아랍어로 '달다'고 적은 셈이고요.
종교가 서로 달라 보이는 이유
그럼 왜 종교마다 그렇게 달라 보일까요. 라다크리슈난은 종교를 큰 집에 난 여러 창문에 빗댔어요. 동쪽 창으로 보면 아침 해가 보이고, 서쪽 창으로 보면 붉은 노을이 보여요. 풍경이 다르다고 집이 두 채인 건 아니죠. 창이 여럿일 뿐이에요.
종교마다 쓰는 말, 입는 옷, 부르는 노래,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른 건 그 종교가 태어난 동네와 시대가 달라서예요. 사막에서 자란 종교와 강가에서 자란 종교가 똑같은 그림을 그릴 리 없잖아요. 겉모습은 그 동네의 사정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체험은 서로 통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어요.
다만 그도 모든 종교가 글자 하나까지 똑같다고 우기진 않았어요. 가리키는 곳이 서로 닿아 있다고 봤을 뿐, 차이를 억지로 지우려 한 건 아니에요.
이 생각이 왜 마음에 남을까
이 이야기가 의미 있는 건, 싸움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어서예요. "내 창이 진짜 창이고 네 창은 가짜야"라고 우기는 대신, "우리 같은 집을 다른 창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고 한 발 물러설 여지를 주거든요.
라다크리슈난은 이 생각을 들고 서양으로 건너가, 인도 철학을 처음으로 차근차근 정리해 소개한 사람이기도 해요. 덕분에 서양 사람들도 동양 종교를 그저 신비한 주술쯤으로 여기던 오해를 한 꺼풀 벗을 수 있었죠. 다른 믿음을 틀린 걸로 보지 않고 그저 다른 창으로 보는 눈, 그게 그가 남긴 선물이에요.
정리
라다크리슈난은 종교의 핵심이 교리가 아니라 직접 겪는 체험이라고 봤어요. 설탕의 단맛처럼, 진짜는 말로 적기 전에 먼저 맛보는 무언가라는 거죠. 종교가 서로 달라 보이는 건 같은 집을 다른 창으로 내다본 결과일 뿐, 창밖 풍경은 서로 닿아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어요.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누가 옳은지 가리는 대신, 한 발 물러서서 서로를 다른 창으로 바라보게 해 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