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시는 가장 큰 하나 대일과 가장 작은 하나 소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한밤에 하늘 끝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밤하늘을 한참 올려다보면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별 너머에 또 별이 있고, 그 너머에도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맨 끝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요. 반대로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위의 작은 점 하나를 더 작게 쪼개고 또 쪼개면 마지막엔 뭐가 남을지 궁금했던 적도 있을 거예요.
신기하게도 2300여 년 전 중국에 살던 혜시라는 사람도 똑같은 질문을 품었어요. 가장 큰 것의 끝, 그리고 가장 작은 것의 끝. 그는 이 두 끝에 '대일'과 '소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오늘은 이 낯선 두 단어가 무슨 뜻인지, 또 왜 한 번 들으면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는지 천천히 풀어 볼게요.

혜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혜시는 기원전 370년쯤 태어나 310년쯤까지, 예순 해 남짓 살았다고 전해져요. '명가'라는 학파에 속한 철학자였는데, 명가는 쉽게 말하면 '말과 이름을 끝까지 따지는 사람들'이었어요. "크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이지?" "같다는 건 또 뭐지?"처럼, 보통은 그냥 지나치는 말들을 붙잡고 늘어진 사람들이지요.
혜시는 위나라에서 높은 벼슬까지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고, 책을 어찌나 많이 지녔는지 "그의 책이 수레 다섯 대 분량"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예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두고 '수레 다섯 대의 학식'이라 칭찬하는 옛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답니다. 또 그는 장자라는 유명한 철학자의 단짝이자 토론 상대였어요. 둘은 만나기만 하면 말씨름을 벌였는데, 강가 다리 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운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질 만큼 유명하지요.

바깥이 없는 가장 큰 것, 대일
혜시가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가장 큰 것은 바깥이 없으니, 이를 대일이라 부른다."
무슨 뜻일까요. 상자를 하나 떠올려 보세요. 그 상자를 더 큰 상자에 넣고, 그걸 또 더 큰 상자에 넣어요. 이렇게 계속 넣다 보면 언젠가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은 가장 큰 상자'에 닿겠지요. 그 상자에는 바깥이 없어요. 만약 바깥이 있다면, 아직 가장 큰 게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이렇게 '더는 바깥이 없는, 모든 걸 품은 하나'를 혜시는 대일, 곧 '큰 하나'라고 불렀어요. 우주 전체를 딱 하나로 본 셈이에요. 너무 커서 더 바깥이 없고, 그래서 둘로 나눌 수도 없는, 오직 하나인 것이지요.

안이 없는 가장 작은 것, 소일
반대쪽 끝도 있어요. 혜시는 이어서 말해요.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소일이라 부른다."
이번엔 거꾸로 해 볼까요. 사과를 반으로 자르고, 그 반을 또 반으로 자르고, 멈추지 않고 계속 잘라 봐요. 끝까지 가면 '더는 안을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알갱이'가 남겠지요. 그 알갱이 안에는 더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안이 남아 있다면 아직 한 번 더 쪼갤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 '더는 안이 없는 가장 작은 하나'가 바로 소일, '작은 하나'예요. 재미있는 점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혜시가 똑같이 '하나'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둘 다 더 나눌 수도 없고 더 보탤 수도 없는 마지막 끝이라서, 양쪽 끝이 묘하게 닮은꼴이 되는 셈이지요.

그럼 크다 작다는 건 누가 정하나요
여기서 혜시의 진짜 재미있는 생각이 나와요. 대일과 소일이라는 양 끝을 정해 두고 보면, 그 사이에 있는 '크다 작다'는 사실 딱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개미에게는 돌멩이 하나가 거대한 산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겐 발끝에 차이는 작은 돌일 뿐이지요. 같은 돌인데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해요. 우리가 큰 산이라 부르는 것도 우주 전체에서 보면 먼지 한 톨이고, 그 먼지조차 더 작은 세계에서 보면 드넓은 땅덩이일 거예요.
혜시는 '같다'와 '다르다'도 마찬가지라고 봤어요. 나와 친구는 얼굴이 달라서 '다른' 사람이지만, 둘 다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존재예요. 더 넓게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 같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건 하나도 없어 다 달라요. 이렇게 같음과 다름을 한자리에 나란히 놓고 보는 생각을 '합동이', 곧 '같음과 다름을 합쳐 본다'고 불러요.

이 생각이 왜 중요할까요
혜시의 말은 얼핏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해요. 실제로 단짝 장자도 그의 이런 따지기를 두고 가끔 농담을 던지곤 했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알맹이가 들어 있어요.
우리는 평소에 '크다', '작다', '같다', '다르다'를 마치 사물에 딱 박힌 사실처럼 써요. 그런데 혜시는 가만히 묻습니다. 그게 정말 그 물건 자체에 들어 있는 성질이냐고요. 아니면 우리가 어디에 서서 무엇과 견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비교의 결과일 뿐이냐고요. 이렇게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말을 한 번 더 뒤집어 보는 일, 바로 그것이 철학의 출발점이에요.

정리
혜시는 2300여 년 전, 가장 큰 것에는 바깥이 없어 '대일'이라 부르고, 가장 작은 것에는 안이 없어 '소일'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그 두 끝 사이에서 크다와 작다, 같다와 다르다는 정해진 게 아니라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봤지요. 그러니 다음번에 무언가를 '크다'거나 '작다'고 말하게 될 때, 잠깐 멈춰서 '누구에게, 무엇과 견주어 그런 걸까' 하고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그 짧은 멈춤이야말로 혜시가 23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건넨 작은 선물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