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825년, 22살의 최한기는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평생 단 하루도 벼슬자리에 앉지 않았다.
생원시는 조선시대 1차 과거 시험이다.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이 생기고, 그다음 대과를 볼 수 있었다.
그게 조선 양반이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오늘날로 치면,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합격 통보를 받은 사람이 그 통보서를 서랍에 넣고 도서관 책상을 선택한 상황이다.
최한기는 진짜 그렇게 했다.
당시 조선에서 양반이 벼슬을 마다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한기에게 관직은 학문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 선택이 이후 그의 인생 전체를 결정했다.

최한기의 서울 집 한 채 값이면 청나라에서 들여온 책 수백 권을 살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책을 택했다.
최한기는 서울 송현, 지금의 종로 일대에 살았다.
그곳엔 연행사가 드나들었는데, 연행사란 베이징을 오가던 조선 사신단이다.
사신단이 귀국할 때마다 청나라에서 번역된 서양 책들이 함께 들어왔다.
천문학, 의학, 수학, 지리학. 최한기는 그걸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가산을 전부 쏟아부었다.
결국 말년에는 사놓은 책을 되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양반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가던 시대에 토지를 팔아 종이 더미와 바꿨다는 건, 그 시절 기준으로도 꽤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와 친했던 사람 중에 김정호가 있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바로 그 지도 제작자로, 두 사람은 책을 매개로 친교를 맺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서양 과학을 사학이라 부르며 배척하던 시절, 최한기는 그것을 기(氣)라는 옛 동양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고 있었다.
사학(邪學)은 "사악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서양 과학이 기독교와 함께 들어오자 당시 성리학 중심의 조선은 이 둘을 묶어 배척했다.
기(氣)는 동양 철학에서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물이나 불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탕이 되는 에너지라고 보면 된다.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의 '장(field)'이나 '에너지'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최한기의 방식은 두 극단의 중간이었다.
서양 학문을 통째로 거부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그대로 베끼지도 않았다.
서양의 천문학·의학·수학을 흡수한 뒤 기(氣) 개념으로 새롭게 짜낸 것, 그게 바로 기학(氣學)이다.
기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주도, 자연도, 인간도 기(氣)의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학문이다.
그 결과물이 『신기통』, 『추측록』, 『기학』이다.
최한기에게 지식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한 것에서만 앎이 생긴다는 게 그의 출발점이었다.
성리학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 본성을 지닌다"고 가르치던 시대에, 그는 정반대 방향에서 철학을 세웠다.

최한기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책은 천 권이 넘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80권뿐이다.
생전에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벼슬도 없고, 제자를 모아 가르치는 스승도 아니었다.
조선 사회는 그의 책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후에야 후학들이 그의 저작을 모아 『명남루총서』로 묶으며 재조명했다.
명남루는 최한기가 쓰던 서재 이름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인물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게 됐다.
그렇지만 천 권 가운데 구백여 권은 흩어졌다.
팔렸거나, 버려졌거나, 불탔거나.
가산을 털어 사들인 책들도, 평생 써 내려간 원고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읽는 최한기는, 그가 남기려 했던 전체의 8분의 1도 안 되는 최한기인 셈이다.
나머지 9할이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지금 그를 어떻게 부르고 있었을까.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