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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9세기 초, 당대의 유학 관료 이고(李翺)는 자신이 평생 비판해온 산속 선승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이고는 호남 지방의 관료였습니다.
당시 관료란 오늘날로 치면 국가고시 수석 출신 엘리트가 정부 요직을 맡은 상황이에요.
그런 그가 약산유엄(藥山惟儼)을 찾아갔습니다.
약산유엄은 당나라 선종, 그러니까 참선과 깨달음을 중심에 두는 불교의 거장이었어요.
약산은 이고가 도착했는데도 본체만체 경전만 읽고 있었습니다.
이고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어요.
"명성은 들은 지 오래됐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저 그렇군요."
약산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손으로는 발 아래 항아리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항아리에 있다(雲在靑天水在瓶)."
구름은 하늘에, 물은 항아리에.
모든 것은 각자의 자리에 있다는 말이에요.
그날 이고는 감동을 담아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유학자가 선승에게서 깨달음을 얻는 건 당시로선 그냥 "이단"이 아니었어요.
하물며 이고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이 만남이 얼마나 아찔한 일이었는지 비로소 보입니다.

이고의 스승은 부처의 사리를 불에 던지라고 황제에게 직언한 사람이었어요.
그 스승이 바로 한유(韓愈)입니다.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이자 유학 부흥 운동의 선구자였어요.
그리고 이고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819년, 황제 헌종이 부처의 사리, 즉 불골(佛骨)을 궁궐 안으로 들이려 했어요.
온 나라가 들뜬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유가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렸어요.
그 글의 이름이 「논불골표(論佛骨表)」, 말 그대로 '부처의 뼈에 반박하는 상소문'입니다.
한유가 그 글에 쓴 말이 지금 읽어도 살벌해요.
"그 뼈를 불속에 던지고 물속에 빠뜨려 영원히 없애야 합니다."
황제한테 바치는 글에 이런 말을 썼으니, 한유는 바로 사형 위기에 몰렸습니다.
결국 조주(潮州)라는 먼 남방으로 쫓겨났어요.
이고는 그런 스승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 이고는 스승이 "불에 태우라"고 했던 종교의 선승들을 몰래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부모가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셈이에요.
그것도 모자라, 그 친구에게서 배운 생각들이 이고의 책 속으로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이고가 「복성서」에서 쓴 멸(滅)이라는 한 글자는, 사실 불교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었어요.
「복성서(復性書)」는 이고가 쓴 세 편의 논문입니다.
'성(性)을 되찾는 글'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성(性)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본래의 맑고 선한 마음입니다.
스마트폰의 공장 출고 상태와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감정(情)이에요.
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정이 본성을 가린다. 감정을 멸(滅)해야 본성이 회복된다."
감정은 앱 과부하처럼 원래 설정을 덮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정을 없애서 초기화하면, 본성이 돌아온다는 논리였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드러나요.
"멸(滅)"이라는 글자는 불교에서 욕망과 번뇌를 끊어내는 것을 뜻하는 멸도(滅度)에서 온 글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워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구조 자체가, 선종의 좌선, 즉 가만히 앉아 잡념을 끊고 본성을 보는 수행과 똑같은 틀이었어요.
이고는 따로 「거불재론(去佛齋論)」이라는 글도 썼습니다.
제목 그대로 "불교를 없애자는 논문"이에요.
하지만 그 논문 바로 옆에 있는 복성서의 수양법은 영락없는 불교였습니다.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든 칼이 불교의 칼이었어요.
그리고 바로 그 모순이, 이 책을 200년 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다시 펼쳐들게 만들었습니다.
이고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나, 한 송나라 학자가 먼지 쌓인 옛 책 한 권을 다시 펼쳤어요.
12세기 송나라의 주희(朱熹)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공자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사상가로 꼽힙니다.
그가 완성한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학문 체계예요.
그런데 그 골격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이고의 복성서 안에 있었습니다.
정이(程頤) 형제와 주희가 성리학의 핵심으로 삼은 개념들을 보면 더 선명해져요.
성(性)과 정(情)의 구분, 감정이 아직 일어나기 전 마음 상태인 미발(未發)과 이미 일어난 상태인 이발(已發)의 구분, 그리고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유지하는 수양법인 경(敬)의 공부.
이것들이 전부 복성서에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그 영향은 조선까지 흘러들었어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8년 동안 편지로 논쟁한 사단칠정논변, 즉 "사람의 도덕적 마음과 일반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논쟁의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인심도심설, 그러니까 "마음에는 도덕적 마음과 욕망의 마음이 있다"는 이론의 뿌리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이고가 약산유엄 앞에서 시를 남기던 그 순간, 스승 몰래 선종의 언어를 빌려와 복성서를 쓰던 그 밤이, 수백 년 뒤 조선 선비들의 편지 논쟁 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한 관료가 몰래 적의 생각을 빌려온 것이 동아시아 지성사의 뼈대가 됐어요.
그러면 우리가 "전통 유학"이라고 외워온 그것의 진짜 출처는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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