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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모종삼이 평생 칸트를 번역한 건 칸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칸트를 이겨야 했기 때문이다.
1909년 산둥성 시골에서 태어난 모종삼(牟宗三)은 1929년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영국 논리학자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분석철학에 빠져들었다.
수학처럼 정확하고 논리처럼 냉정한 서양 사유가 스무 살 청년에게는 "드디어 진짜 학문을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스승 슝스리(熊十力)를 만났다.
슝스리는 20세기 초 신유가(新儒家)의 시조 격 인물로, 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학문 운동을 일군 사람이다.
그가 모종삼에게 던진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양지(良知)는 가정이 아니라 진실한 존재다."
양지란 공자와 맹자가 말한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심어진 도덕적 판단력'이다.
오늘날로 치면 스마트폰 출고 설정처럼, 인간이라면 기본값으로 갖고 태어나는 선함의 센서 같은 것이다.
슝스리는 그것이 철학적 가설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능력이라 주장했다.
컴퓨터공학을 파던 학생이 "네가 짜는 코드는 결국 인간 마음을 흉내낼 뿐이야"라는 말을 듣고 진로를 바꾼 상황과 비슷하다.
모종삼은 그날 이후 방향을 틀었다.
서양 논리학이 아니라, 송명(宋明) 시대 유학의 심성론, 즉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란 무엇인가'를 파고드는 동양 철학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떠난 1949년 겨울, 모종삼이 들고 간 것은 옷가지 몇 벌과 슝스리에게 받은 노트 한 권이 전부였다.
1949년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한 해다.
지식인들은 선택해야 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모종삼은 가족과 수년치 장서를 대륙에 두고, 홀로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가 이후 자리 잡은 곳은 신아서원(新亞書院)이었다.
역사학자 첸무(錢穆)와 철학자 탕쥔이(唐君毅)가 망명한 학자들을 위해 홍콩에 세운 학교다.
오늘날로 치면 해외 난민 지식인들이 허름한 건물 한 채를 빌려 강의실을 만든 셈이다.
유학(儒學)은 본디 '땅에 뿌리내린 사상'이다.
조상의 무덤, 고향의 강, 부모와 이웃이 있는 곳에서 도덕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작 현대 신유가를 완성한 인물은 평생 고향을 잃은 망명객이었다.
한식당을 차리고 싶은데 김치와 된장이 없는 외국에서 평생 한식 레시피북을 써야 하는 상황, 그것이 모종삼의 삶이었다.
결국 그는 본토로 돌아가지 못한 채 대만 사범대와 홍콩 중문대를 오가며 수십 년을 강의했다.
고향이 없는 철학자가 '인간의 뿌리'를 주제로 쓴 글들, 그 역설이 모종삼 사상의 가장 강렬한 배경이 됐다.

칸트가 200년 동안 닫아둔 문을, 모종삼은 동양 사상으로 다시 열려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18세기 독일 철학자로, 서양 근대 철학의 판을 완전히 바꾼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인간은 현상만 볼 수 있을 뿐, 사물의 본체는 절대 직접 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전부 우리 뇌가 만든 필터를 거친 이미지이고, 그 필터 없이 사물 자체를 꿰뚫어 보는 능력인 지적 직관은 오직 신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종삼은 1971년 『지적 직관과 중국 철학』을 출간하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아니다. 유학의 양지, 불교의 반야(般若), 도가의 현람(玄覽)이 바로 그 능력이다."
반야란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고, 현람은 도가에서 '마음을 비워 우주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에 절대 갈 수 없다"고 단언한 과학자에게 "우리는 매일 명상으로 우주에 다녀온다"고 답한 격이었다.
칸트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칸트 체계의 근간을 뒤집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모종삼은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서양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확신했다.
서양 철학이 인간의 한계를 그은 자리에서, 동양은 수천 년째 그 한계를 넘는 수행을 해왔다.
모종삼의 주장은 "동양도 비슷한 게 있어요"가 아니었다.
"서양이 불가능하다 선언한 것을 동양이 이미 하고 있었다"는, 훨씬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대부분의 학자가 은퇴하는 나이에, 모종삼은 칸트 전체와 정면 승부를 시작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각각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의 미적 판단은 어디서 오는가'를 다룬 책들로, 합치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서양 철학의 최고 난이도 텍스트다.
모종삼은 이 세 권을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혼자서 중국어로 번역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단순 번역이 아니라 매 권에 유학적 해석을 덧붙인 방대한 주해를 달았다.
일흔 살 노인이 독일어 원서 수천 페이지를 혼자 옮기면서, 매 챕터마다 동양 사상으로 다시 풀어쓴 해설서까지 덧붙인 셈이다.
전 세계 어느 칸트 학자도 3대 비판서를 단독으로 번역하고 주해한 사례는 거의 없다.
첫 권 출간 당시 그는 이미 70대였다.
그는 1995년, 86세의 나이로 대만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강의 주제는 칸트와 천태종(天台宗) 불교의 비교였다.
천태종은 6세기 중국에서 성립한 불교 종파로, 현상 세계 안에서 절대적 진리를 직접 발견할 수 있다는 사상 체계다.
모종삼은 죽는 날까지 동양과 서양의 언어를 한 문장 안에서 번갈아 쓰고 있었다.
그가 평생 하려 한 것은 결국 하나였다.
서양이 그린 인간의 지도에, 동양이 수천 년 동안 걸어온 길을 덧그리는 것.
그리고 그 지도를 그린 사람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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