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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황제가 사형을 명한 신하가 있었다.
죄목은 상소문에 "이 마른 뼈를 물과 불에 던지소서"라고 쓴 것이었다.
819년 정월, 당나라 헌종은 법문사(法門寺)에 보관된 석가모니의 손가락뼈, 즉 진신 사리를 궁궐로 가져와 30일간 친견 행사를 열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가 나서서 종교 유물 전시 행사를 한 달 내내 연 셈이다.
황제가 직접 경배하고, 귀족들이 줄을 서고, 백성들은 팔다리를 태워 바치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때 형부시랑 한유가 그 상소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렸다.
형부시랑은 오늘날 법무부 차관급 고위직이다.
황제는 즉각 사형을 명했다.
재상들이 "한유는 충직하여 죽이기엔 아깝다"고 만류한 덕에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그는 당장 조주(潮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조주는 지금의 광동성 끝자락, 당시엔 사실상 유배지나 다름없는 변경 도시였다.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것보다 더 대담한 선언이 따로 있었다.
한유는 대표 에세이 「원도(原道)」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요임금에서 순임금, 우임금,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지던 도(道)의 계보가 맹자 이후 단절되었다."
「원도」는 '도의 근원을 따진다'는 뜻의 에세이로, 여기서 도(道)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맹자가 죽은 기원전 4세기 이후 약 1100년이 지났다.
그 오랜 공백 동안 천하를 채운 것은 불교와 도교였다.
한유는 그것을 "오랑캐의 가르침"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사상의 정통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 주장에는 숨겨진 논리가 하나 더 있었다.
계보가 단절되었다고 선언한 사람이 그 계보를 이어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상 자신을 열한 번째 계승자로 올려놓는 선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거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던 서양 철학의 본류가 2000년 동안 끊겼다, 내가 지금부터 다시 잇겠다"고 공식 발표한 것과 비슷한 무게였다.

사상 혁명에는 언어 혁명이 따라왔다.
한유는 당대를 지배하던 변려문(駢儷文)을 버렸다.
변려문은 4자 또는 6자로 대구를 맞춰 쓰는 장식적 문체로, 오늘날로 치면 모든 문장을 사자성어 형식으로만 써야 하는 규칙 같은 것이다.
한유가 선택한 대안은 고문(古文), 즉 진(秦)·한(漢) 시대의 소박하고 직접적인 산문이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자연스럽게 담는 문체였다.
그는 이 방향을 혼자 외친 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운동으로 밀어붙였다.
이것이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그가 직접 써서 본보기로 남긴 글이 「사설(師說)」과 「진학해(進學解)」였다.
「사설」은 "스승이란 무엇인가"를 다룬 에세이로, 지위나 나이가 아니라 배움을 기준으로 스승을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이 문체 개혁은 후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출발점이 된다.
당송팔대가란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을 쓴 여덟 명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한유는 그 첫 번째다.
문체를 바꾸는 것은 단순한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식이 달라지면 담을 수 있는 생각의 종류도 달라진다.

유배길 8000리에서 한유는 열두 살 딸을 잃었다.
좌천 판결이 나자, 한유는 겨울 한복판에 장안에서 조주까지 길을 떠났다.
남관(藍關)이라는 고갯마루에서 눈보라를 만나 말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뒤를 따라온 조카손자 한상(韓湘)이 고개 위에서 그를 만났다.
한유는 그 자리에서 시를 남겼다.
"눈이 남관을 덮어 말이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분노도 억울함도 아닌, 눈이 많이 왔다는 사실만 담은 시였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겁게 읽힌다.
조주로 가는 길에서 딸 한나(韓拏)가 병으로 숨졌다.
열두 살이었다.
한유는 아이를 데리고 함께 떠났다가 그 길에서 잃었다.
부임지에 도착하니 강에 악어떼가 들끓었다.
한유는 「제악어문(祭鱷魚文)」을 지어 강가에서 제를 올렸다.
"이 땅을 떠나라"고 악어들에게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관리였다.
수백 년이 흘렀다.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가 성리학 체계를 완성하면서 한유를 도통의 정식 계승자로 추인했다.
주희는 유교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그의 사상은 이후 조선 500년을 지배했다.
한유가 「원도」에서 자기 손으로 그린 그 명단에 자기 이름이 새겨지는 데는 수백 년이 걸렸다.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던 그날, 그가 그것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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