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양반 자제가 과거 답안지를 던졌다.
그가 향한 곳은 한양이 아니라 지리산이었다.
21세의 최여신, 훗날 휴정이라 불릴 이 청년은 진사 초시에 막 합격했다.
진사 초시는 조선의 과거 시험 첫 관문으로, 통과하면 양반 관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자격증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사법시험 1차를 막 통과한 셈이다.
그런데 그는 답안지를 내던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아버렸다.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유교는 떠받들고 불교는 짓밟는 나라, 한마디로 불교를 믿는 것 자체가 퇴물 취급을 받던 시대였다.
유생이 머리를 깎는다는 건 신분과 가문을 동시에 내던지는 일이었다.
친구들이 한양 관청에 출근할 때, 그는 산속 절에서 밥을 빌러 다녔다.
그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파벌이 사람을 죽이던 시대에, 한 늙은 승려는 적의 책까지 끌어안았다.
휴정이 『선가귀감』을 펴냈을 때만 해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선가귀감』은 "선 수행의 거울"이라는 뜻의 불교 입문서로, 승려들 사이에서 교과서처럼 읽히던 책이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교를 해설한 『유가귀감』, 도교를 해설한 『도가귀감』을 잇달아 내고 세 권을 하나로 묶었다.
그의 주장은 삼교회통, 즉 유교·불교·도교 세 종교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선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 이슬람, 불교가 사실 같은 말 하고 있다"는 책을 낸 셈이다.
하필 이게 1570년대였다.
동인과 서인이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진영이 "우리만 옳다"를 외치는 시대에, 이 노승은 "다 같다"는 책을 써냈다.
그는 불교 내부 싸움에도 손을 댔다.
당시 "참선만 해야 한다" 대 "경전만 읽어야 한다"로 갈려 있던 종파 논쟁에 선교겸수를 내세웠다.
참선과 경전 공부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쪽만 옳다 외치는 진영 모두를 동시에 틀렸다고 한 거였다.

3년 전 자신을 가두었던 임금이 이번에는 무릎을 꿇다시피 그를 불렀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이 터졌다.
동인계 인사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수백 명이 처형된 대형 정치 옥사였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휴정이 예전에 썼던 시(詩) 한 편이 증거로 제출됐다.
그는 끌려가 친국을 받았다.
이미 일흔 가까운 나이였다.
친국이란 임금이 직접 신문에 나서는 자리로, 보통 거기에 끌려가면 살아 나오기가 어려웠다.
결국 무죄로 풀려나긴 했다.
하지만 노승 한 명을 그렇게 다뤘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다.
3년 뒤인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됐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묘향산 깊숙이 있던 그 노승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가 원한 건 딱 하나였다.
나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73세 노승은 산을 내려오면서 한마디만 했다.
칼을 들어라.
휴정은 팔도도총섭에 임명됐다.
전국 승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었다.
그는 묘향산에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이란 "지금 당장 일어서라"는 내용을 전국에 알리는 공문서로, 오늘날로 치면 전국 사찰에 긴급 공지를 날린 셈이었다.
제자들이 응답했다.
사명당 유정은 영남에서, 처영은 호남에서 승병을 이끌고 합류했다.
전국에서 5천 명이 넘는 승려가 칼과 창을 들고 모였다.
그런데 이게 이상한 일이었다.
불교에서 살생은 근본 금지다.
불자라면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 계율을 평생 가르친 사람이, 이제 칼 든 군대의 수장에 서 있었다.
누군가는 물었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불도냐고.
그의 대답은 짧았다.
"중생을 구하는 일 또한 불도."
평양성 탈환 전투에 가담한 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조용히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1604년, 85세로 입적했다.
죽기 전 그는 자기 영정을 보며 게송 하나를 남겼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80년 뒤에는 내가 너로구나."
그림 속 자신에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누구이고, 이 몸은 무엇인가.
평생 그 질문을 붙들고 살다 간 사람의 마지막 말치고는, 너무 조용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1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