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권근이 명나라로 떠난 그날, 동료들은 그가 살아 돌아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1396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 사건이 터졌다.
조선이 명에 보낸 공식 외교 문서인 표전문(表箋文)의 표현이 무례하다며, 명 태조 주원장이 "작성자를 직접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진짜 작성자는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그때 권근이 자청해서 그 사신길에 올랐다.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다.
회사가 클라이언트에 보낸 메일이 화근이 됐고, 클라이언트가 "그 메일 쓴 사람 당장 데려와"라고 요구했는데, 실제 작성자는 도망가고 다른 부서 직원이 자청해서 클라이언트 회의실로 들어간 거다.
그런데 권근은 죽지 않았다.
명 태조가 그 자리에서 즉흥으로 시제(詩題)를 내리면 신하가 바로 시를 지어 바치는 응제시(應製詩) 시험이 시작됐다.
권근은 그 자리에서 시 24편을 지어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살아 돌아왔을 뿐 아니라 황제에게 책까지 하사받았다.
즉흥 발표 한 번으로 회의실을 뒤집어놓고 선물까지 챙겨 나온 셈이다.
이 사람이 권근이다.

유배지의 권근에게는 책장 한 칸도 없었지만, 그는 성리학 전체를 종이 한 장에 그려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1390년, 권근은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돼 유배를 떠났다.
고려 말 명나라에 무고 사건을 일으킨 정치 싸움으로, 죄 없이 쫓겨난 학자들이 줄을 이었던 그 사건이다.
권근은 우봉, 영해, 흥해 등 여러 유배지를 전전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시간에 정치 회고록을 쓰거나 억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근이 한 일은 달랐다.
그는 성리학 전체의 구조를 한 장의 도식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성리학은 12세기 중국에서 완성된 유교 철학이다.
"인간의 본성이 곧 우주의 법칙과 같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인간과 하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탐구한다.
스마트폰 공장 출고 설정처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도덕과 이치가 설치돼 있다는 것이다.
개념이 워낙 추상적이라 수백 권의 텍스트를 읽어도 전체 구조가 잡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권근은 그 복잡한 구조를 동심원과 선으로 압축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이고, 그 핵심 그림이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다.
천인심성합일지도란, 하늘·사람·마음·본성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를 동심원 하나로 표현한 그림이다.
미적분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교과서 500쪽 대신 구조 마인드맵 한 장을 먼저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사상사에서 철학을 그림으로 압축한 첫 번째 시도였다.

권근은 스승이 끝까지 지킨 나라를 버리고, 그 나라를 무너뜨린 사람들 곁에 섰다.
권근의 스승은 이색(李穡)이었다.
고려 말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몽주·정도전 등 수많은 인재를 키워낸 시대의 거목이다.
권근은 그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와 함께 공부했다.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고려가 무너졌다.
정몽주는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고려 편에 서다 살해된 학자였다.
권근과 함께 공부하던 많은 동문들은 "새 왕조에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키며 은거했다.
하지만 권근은 달랐다.
그는 조선에 출사했고,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모두에게 깊이 신임을 받았다.
자기 멘토가 이끌던 조직이 무너지고, 그 조직을 무너뜨린 세력이 새 회사를 차렸을 때, 그 새 회사에 입사해 사내 교재를 다시 쓰는 일을 맡은 셈이다.
배신인가, 현실인가.
권근이 조선에서 한 일은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고, 그 작업은 고려를 떠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그 선택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권근이 유배지에서 그린 그림 한 장은, 그 뒤 500년 동안 조선 학자들의 첫 페이지가 됐다.
1409년 권근이 세상을 떠난 뒤, 입학도설은 성리학을 처음 배우는 조선 학자들이 가장 먼저 펼치는 표준 입문서가 됐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영향은 따로 있었다.
권근이 사용한 방식 자체, 즉 그림과 해설로 학문을 설명하는 도설(圖說) 방식이 조선 성리학 전체의 표준 표현 방식이 됐다는 점이다.
약 200년 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李滉)은 임금에게 성리학을 열 장의 그림으로 설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쳤다.
이황은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그림으로 철학을 설명하는" 방식의 뿌리에는 권근의 도설 전통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한 개발자가 처음으로 오픈소스 튜토리얼을 만들었고, 그것이 업계 표준 온보딩 방식이 되어 수십 년 뒤 후배들이 같은 구조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권근이 유배지에서 가진 것은 붓과 먹과 종이뿐이었다.
그는 거기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500년을 살아남았다.
당신이 오늘 "인간의 본성"이나 "마음의 구조" 같은 말을 어렴풋이라도 아는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그 언어의 어딘가에 권근의 손길이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1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