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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811년 어느 날, 람모한 로이는 자기 형수가 죽은 형의 시신 위에서 산 채로 불타는 것을 지켜봤어요.
형 자그모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족과 사제들은 형수에게 사티를 강요했어요.
사티는 힌두교 과부가 죽은 남편의 화장 장작 위에 함께 올라가 불에 타 죽는 의식이에요.
배우자를 잃었는데 장례식에 온 어른들이 "당신도 같이 가야 해"라고 말하는 세계예요.
그리고 그것이 법도 아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됐어요.
람모한은 그 화염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봤어요.
이 장면이 충격인 이유가 따로 있어요.
람모한은 정통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거든요.
브라만은 힌두교 계층의 최상위 사제 계급으로, 바로 사티 같은 의식을 집행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는 이 의식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자란 집안의 아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날, 그 화염이 자기 형수를 태우는 순간에 뭔가가 부서졌어요.
그가 평생 달고 살게 될 물음표가 거기서 시작됐어요.

그는 사티를 부수기 위해, 사티를 만든 사람들의 무기인 산스크리트 경전을 그대로 들고 왔어요.
분노해서 거리로 나간 게 아니었어요.
람모한은 도서관으로 갔어요.
베다와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원전을 직접 펼쳐서 읽기 시작했어요.
베다는 힌두교 사제들이 의식의 정당성을 끌어오는 경전 묶음이에요.
우파니샤드는 베다에서 파생된 철학 문헌으로, 힌두 사상의 뼈대를 이루는 텍스트예요.
람모한이 그 원문을 샅샅이 뒤진 결과, 사티를 "의무"로 명령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이걸 비유하면 이런 거예요.
회사 임원이 팀의 핵심 업무 매뉴얼을 직접 들고 나와 "이 매뉴얼 어디에도 그런 규정은 없어요"라고 동료들 앞에서 증명하는 것과 같아요.
자기 카스트가 수백 년간 신성하게 여긴 근거를, 자기가 직접 검증해서 "없다"고 선언한 거예요.
그는 1818년과 1820년, 두 차례에 걸쳐 소책자를 냈어요.
제목은 「과부 화형 옹호자와 반대자 사이의 대화」로, 사티 찬반 논쟁을 경전 원문과 함께 정리한 글이에요.
정통 브라만 측이 반발했지만, 자기들이 신성시하는 경전을 직접 부정할 수는 없었어요.

1829년 12월 4일, 사티는 람모한 로이의 청원 한 장으로 법이 됐어요.
그는 당시 영국령 인도의 총독이었던 윌리엄 벤팅크 경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했어요.
벤팅크는 이를 받아들여 '벵골 사티 규제법'을 공포했고, 이 법으로 사티는 공식 범죄가 됐어요.
그런데 정통 힌두 측이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그들은 멀리 런던의 추밀원에 항소했어요.
추밀원은 영국 왕실의 최고 자문 기관으로, 식민지 법에 대한 최종 심판권을 가진 곳이에요.
자기들이 신성하게 여긴 의식을 금지한 법을 뒤집어달라고 영국 본토에 직접 호소한 거예요.
이 소식을 들은 람모한은 직접 배를 탔어요.
자기가 기여한 법을 지키기 위해서요.
오늘날로 치면, 자기 회사 규정에 반발하는 임원들이 본사에 이의를 제기하자 규정을 만든 당사자가 직접 날아가 변호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 신분이 흥미로웠어요.
당시 무굴 황제 아크바르 2세가 그에게 '라자(Raja)' 칭호를 주고 사절로 파견했거든요.
라자는 '왕' 또는 '영주'를 뜻하는 칭호로, 람모한은 황제의 이름을 달고 영국 왕실에 인도 공식 사절로 입성했어요.
1831년 런던에 도착했고, 추밀원의 항소는 결국 기각됐어요.
사티 금지법은 살아남았어요.

사티 폐지법을 지킨 그는 결국 인도가 아닌 영국 브리스톨의 한 묘지에 묻혔어요.
1833년 9월 27일, 람모한 로이는 영국 브리스톨 근교 스테이플턴에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유해는 인도로 돌아오지 않았고, 브리스톨의 아노스 베일 묘지에 그대로 안장됐어요.
정통 힌두 측은 람모한이 바다를 건넌 시점부터 이미 '오염된 자'로 봤어요.
이 금기의 이름이 칼라 파니(kala pani)예요.
'검은 물', 즉 바다를 건너면 카스트가 더럽혀진다는 정통 브라만의 규율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직급이 박탈되는 시스템이에요.
그러니 그의 인도 귀환은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할 여정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돌아오기 전에 먼저 죽었어요.
인도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자기가 평생 바꾸려 했던 그 땅의 흙 한 줌도 밟지 못했어요.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브라만의 경전으로, 브라만의 의식을 폐지한 사람이었는데요.
그의 묘비는 지금도 브리스톨 아노스 베일 묘지에 있어요.
인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을,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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