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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임금이 세 번 사람을 보냈지만, 이항로는 한 번도 한양으로 가지 않았어요.
오늘날로 치면 SKY를 수석 졸업한 사람이 대기업 임원직 보장을 평생 거절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책만 읽은 격이에요.
그것도 딱 한 번이 아니라, 평생.
이항로는 1792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어요.
서울에서 동쪽으로 약 60km, 지금도 차로 한 시간은 걸리는 산골이에요.
그는 이 산골 거처 노적실에서 헌종, 철종, 고종 세 임금의 부름을 모두 거절하며 70여 년을 책과 함께 살았어요.
조선에서 임금이 내리는 벼슬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어요.
가문 전체의 명예이자,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이었어요.
그런데 이항로는 그걸 평생 돌려보냈어요.
그는 성리학의 올바름을 지키는 게 벼슬보다 중요하다고 믿었어요.
성리학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탐구한 조선의 지배 철학으로, 오늘날로 치면 평생 윤리학을 파고드는 학문이에요.
벼슬길에 나가면 정치와 타협해야 하고, 그러면 학문의 순수함이 흐려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산속 노인이 76세에 조선 최고 권력자에게 한 장의 종이로 맞섰어요.
1866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공사를 강행했어요.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어린 왕 대신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사람이에요.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270년 만에 다시 짓겠다고 나선 거예요.
문제는 공사 비용을 백성에게 강제로 걷는 방식이었어요.
원납전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은 "자발적 기부"지만 사실상 강제 징수였어요.
이미 생활이 빠듯한 백성들에게 거대한 토목 공사의 비용을 떠넘긴 거예요.
이항로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평생 침묵을 지키던 노학자가 76세에 상소를 올렸어요.
상소는 왕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공식 문서, 오늘날의 공개 성명서예요.
평생 회사 정치를 멀리하던 노교수가 은퇴 직전 CEO에게 공개 반대 성명을 낸 것과 같은 충격이었어요.
하지만 이항로에게 더 큰 위기는 따로 있었어요.
그해 서양 함대가 강화도를 두드리고 있었거든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그해, 양평 산속에서 한 통의 상소가 한양으로 올라왔어요.
1866년, 병인양요가 터졌어요.
조선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자, 프랑스 함대가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외교 분쟁이 순식간에 군사 충돌로 번진 거예요.
이항로는 척화소를 올렸어요.
척화소란 서양과 절대 화친하지 말라는 상소예요.
"서양과 손잡는 건 짐승과 손잡는 것과 같다. 교역을 허용하는 순간 조선의 정신이 무너진다"는 게 그의 논리였어요.
이 상소가 조선 말 위정척사사상의 출발점이 됐어요.
위정척사란 "올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우리 고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외세의 문화·경제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에요.
서양 무기 앞에 조선 군대가 흔들리던 시기였어요.
그 한가운데서 산속 노인의 글 한 편이 정신적 저항선을 새로 그었어요.
외부의 총포가 아니라, 내부의 정신을 지켜내야 한다는 선언이었어요.
평생 산속에 숨어 책만 읽던 학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산을 내려와 총을 들었어요.
이항로는 1868년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있었어요.
이항로의 호 "화서"를 딴 학맥, 화서학파가 그들이에요.
최익현, 유인석, 김평묵, 유중교 등 화서학파 문인들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0년대 항일 무장 투쟁까지 한국 의병운동의 중심이 됐어요.
의병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성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저항한 자발적 군대예요.
은퇴한 노교수의 강의 노트가 30년 후 거리 시위의 동력이 된 격이에요.
이항로 본인은 총 한 번 들지 않았어요.
상소 몇 장, 제자들과의 긴 토론, 그리고 산속에서 쌓은 수십 년의 사유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그 글이, 한 세대 뒤에 무기를 든 손을 움직였어요.
평생 벼슬을 거부하며 산속에 숨어 살던 사람이, 죽고 나서야 가장 큰 힘을 발휘했어요.
역사에서 가장 조용한 목소리가 가장 오래 울리는 이유가 혹시 여기 있는 건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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