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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89년 6월 8일 새벽, 83세의 송시열은 임금이 보낸 사약 앞에서 두 번 절했어요.
원망도 없었고, 저항도 없었어요.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이 보낸 사자를 맞이하고,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두 번 한 뒤 독약이 든 잔을 비웠어요.
평생 회사에 충성한 임원이 회사에서 권고사직 통보를 받고, 그 회사 방향으로 정중히 인사를 두 번 한 뒤 사인하는 장면이에요.
이게 말이 되는 행동처럼 보이지 않죠.
그런데 송시열은 그렇게 했어요.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그가 누구였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송시열은 조선에서 주자학을 가장 깊이 구현한 학자였어요.
주자학이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주의 법칙으로 설명한 사상으로, 오늘날로 치면 삶의 운영체제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 운영체제를 임금에게 직접 가르친 사람이 송시열이었어요.
임금이 잘못된 명을 내렸다고 해도, 임금의 명에 따르는 것 자체가 그 운영체제의 규칙이었어요.
그래서 절을 했어요. 죽는 순간까지도 원칙을 버리지 않은 거예요.
효종과 송시열은 청나라를 진짜로 칠 작정이었어요.
1649년 즉위한 효종은 젊은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굴욕을 잊지 못한 왕이었어요.
그는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을 사부로 불러들여 비밀리에 북벌(北伐)을 준비했어요.
북벌이란 북쪽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벌하겠다는 계획이에요.
이게 얼마나 진지한 계획이었냐면, 당시 명나라는 이미 망한 지 5년이 지난 상태였어요.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보면 청나라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효종과 송시열은 진짜로 만주 진군을 계획했어요.
10년 동안 사장과 본부장이 함께 비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거예요.
군사 재정을 정비하고, 사대부들이 납득할 명분론을 다듬었어요.
그런데 1659년 효종이 41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10년짜리 계획이 한순간에 사라졌어요.
송시열에게는 가장 믿었던 군주이자 동지를 잃은 날이었어요.
그리고 이 죽음이 송시열의 나머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한 사람의 상복을 9개월 입느냐 1년 입느냐, 그 석 달 차이로 송시열은 결국 죽었어요.
효종이 죽자 조정에서 이상한 논쟁이 시작됐어요.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오래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신하들이 두 파로 갈렸어요.
오늘날 기준으로는 "그게 뭐가 중요해?" 싶겠지만, 당시에는 이게 왕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어요.
예송(禮訟)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은 단순한 의례 싸움이 아니었어요.
왕실의 권위를 누가 해석하느냐, 즉 조선의 권력이 어디로 가느냐의 싸움이었어요.
회사 창업주 장례식에서 검은 정장을 9개월 입자는 파와 1년 입자는 파가 갈려, 경영진이 통째로 교체되는 상황이에요.
1659년 1차 예송에서 송시열은 1년설을 밀었어요.
그리고 승리했어요.
하지만 1674년 효종비가 세상을 떠나자 2차 예송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그의 9개월설이 패배했어요.
남인이 집권하고 송시열은 유배를 떠났어요.
남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권력을 다퉈온 정치 세력으로, 두 집단은 수십 년째 조정을 둘로 나눠온 사이였어요.
그리고 1689년,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정권이 통째로 뒤집힌 기사환국에서 결국 사약이 내려졌어요.
상복의 길이로 정권이 두 번 바뀌었고, 그 끝에 사람이 죽었어요.
사약을 마신 송시열은 죽은 뒤 조선에서 유일하게 자(子) 칭호를 받았어요.
자(子)는 공자, 맹자, 주자처럼 성인으로 인정받을 때 붙는 칭호예요.
학문의 세계에서 신급으로 추앙받는다는 뜻인데, 조선 500년 역사에서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은 딱 한 명이에요.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다시 뒤바뀌면서 송시열은 복권되고 영의정에 추증됐어요.
추증이란 죽은 뒤에 관직을 올려주는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사후 명예 부회장으로 추대하는 거예요.
더 놀라운 건 1704년의 일이에요.
충북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졌어요.
망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 황제를 제사 지내는 사당인데, 이건 송시열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을 따른 거였어요.
명나라가 망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죽으면서 "명나라 황제를 잊지 말라"고 했어요.
결국 그가 사약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인데, 죽으면서도 그 의리를 유언으로 남긴 거예요.
사후 100여 년 뒤 그의 문집은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됐어요.
그제야 "송시열"이 아니라 "송자(宋子)"가 됐어요.
권고사직당한 임원의 동상이 수십 년 뒤 본관 앞에 세워지고 명예 창업주로 추대된 셈인데,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예요.
83세에 사약을 마시고 도성 방향으로 절을 두 번 한 사람.
그는 자신을 죽인 시스템을 끝내 원망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 시스템을 가장 깊이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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