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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황제 본명을 활자로 박는 건, 명·청 시대에 멸문지화를 뜻하는 금기였어요.
장태염(章太炎)은 1903년 그 금기를 신문 지면에 그대로 인쇄했어요.
상하이 조계에서 발행되던 일간지 소보(蘇報)에 반박 논설을 실으면서, 광서제를 본명 재첨(載湉)으로 표기하고 "小醜(소추, 작은 광대)"라 써넣었어요.
조계는 청 왕조의 법이 직접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구역이었어요.
그래도 이건 명백한 선언이었어요.
비유하자면 이래요.
회사 인트라넷에 사장 실명과 "광대"를 나란히 올리고, 다음 날 가방 메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는 거예요.
단, 그 게시물을 지우지도, 해명하지도 않으면서요.
그는 체포를 피하지 않았어요.
3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그가 한 말은 이랬어요.
"옥중에서 불경을 읽고 더 혁명적이 되었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더 과격해진 학자예요.
처음 장태염은 순수한 문헌학자였어요.
그가 평생 붙들었던 학문은 고문경학(古文經學)이에요.
한나라 때 벽 속에서 발굴된 고대 글자체 경전을 한족 문명의 진짜 원본으로 보는 학파예요.
스승은 청말 최고의 고증학자 유월(兪樾)이었어요. 수십 년에 걸쳐 고전 텍스트를 실증 분석한 학문의 거장이에요.
그런데 한족의 가장 오래된 기록을 파면 팔수록 결론이 하나로 모였어요.
만주족이 세운 청(淸) 왕조는 한족 역사의 정통 계승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이 논리를 구서(訄書)라는 평론집에 정리했어요. 구서는 "강압당한 자의 책"이라는 뜻이에요.
박물관 큐레이터가 유물 도록을 만들다가 그 도록을 그대로 시위 자료로 인쇄해 거리에 뿌린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학문의 결과물이 혁명의 무기가 되는 순간이에요.
장태염의 고문경학이 딱 그랬어요.

훈장을 부채에 달아 들고 총통부에 쳐들어갔어요.
1913년 장태염이 실제로 한 일이에요.
신해혁명이 청 왕조를 무너뜨린 뒤 초대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장태염을 회유하려 이등 가화훈장(嘉禾勳章)을 보냈어요.
가화훈장은 중화민국이 제정한 국가 훈장이었어요.
장태염은 그 훈장을 끈으로 부채에 묶어 달았어요.
그러고는 그 부채를 손에 들고 총통부 정문 신화문(新華門) 앞에 나타났어요.
안으로 들어가 위안스카이에게 "民賊獨夫(민적독부, 백성의 것을 훔친 외로운 폭군)"라고 욕을 퍼붓고 가구를 부쉈어요.
회사가 준 우수사원 트로피를 부채에 달고 사장실에 들어가 책상을 엎은 장면이에요.
그는 결국 3년간 가택연금되었어요.
그 기간에 단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연금이 풀리자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1906년 도쿄의 좁은 셋방 강의에서, 중국 현대문학이 싹텄어요.
강사는 장태염이었고, 청강생 중에 루쉰(魯迅)이 있었거든요.
감옥에서 풀려난 장태염은 도쿄로 건너가 혁명 단체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주필을 맡으면서 사적인 강의를 열었어요.
그 자리에는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 언어학자 전현동과 황간도 있었어요.
혁명을 설계하면서 동시에 한 세대의 학문을 길러낸 거예요.
루쉰은 훗날 장태염을 이렇게 적었어요.
"학문이 있는 혁명가."
혁명가이지만 공허하지 않고, 학자이지만 서재에 갇혀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처음에 그는 경전을 읽는 학자였어요.
텍스트를 파다가 왕조를 부정하게 됐고, 황제를 광대라 부르다가 감옥에 갔어요.
나와서는 도쿄 셋방에서 루쉰을 길렀어요. 공부가 사람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장태염을 보면 알 것 같기도 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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