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대나무 조각에 글을 새기던 시대였다.
종이가 없었으니 책 한 권을 만들려면 대나무를 잘라 납작하게 다듬고, 글자를 새기고, 끈으로 엮어야 했다.
그 무게와 부피를 생각하면 수레 한 대 분량의 책이란 오늘날 대형 서점 한 칸을 채우는 분량과 비슷하다.
혜시는 그것을 다섯 수레 가득 썼다.
『장자』의 천하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혜시의 책은 다섯 수레에 가득 찼다(其書五車)."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 아래서 재상을 지낸 인물의 저술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알려주는 문장이다.
그는 단순한 관료가 아니었다.
제나라, 초나라와의 외교를 설계한 전략가였고, 동시에 논리와 언어의 한계를 탐구한 철학자였다.
문제는 그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이 지금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혜시의 사상은 그의 저술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평생 그와 논쟁을 벌인 장자의 텍스트 안에 흩어진 파편으로만 존재한다.
적의 책 속에서만 살아남은 철학자.
그 아이러니가 혜시라는 인물의 초상이다.
흰 돌멩이 하나를 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눈을 감으면 손에서 단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흰색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뜨면 흰색이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단단함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혜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감각의 한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얀 것'과 '단단한 것'은 동시에 하나의 돌 안에 함께 성립할 수 없다.
각각의 속성은 독립적이며, 우리가 '흰 돌'이라고 부를 때 그 두 속성이 하나로 묶인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논리였다.
이것이 견백석(堅白石) 논변이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이 주장은 억지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전국시대 중국에서 이 논변이 가진 의미는 달랐다.
그때까지 중국 철학은 '이름(名)과 실질(實)의 관계', 즉 우리가 사물에 붙이는 말이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가리키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혜시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방에는 끝이 없으면서도 끝이 있다."
"오늘 월나라를 떠났는데 어제 도착했다."
이것이 혜시가 남긴 열 가지 명제, 이른바 역물십사(歷物十事)의 일부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우리의 언어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인 문장으로 보여주려 한 시도였다.
논리학의 역사에서 보면 이것은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자리에 있다.
달리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그 논변처럼, 언어와 현실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충격이었다.
전국시대 중국에서 이런 종류의 논의를 벌인 사람은 혜시가 거의 유일했다.
그리고 그 논의는 그가 죽은 뒤 계승되지 않았다.
호량(濠梁)이라는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자가 먼저 말했다.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저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시가 받아쳤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는가?"
장자가 되받았다.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혜시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아니므로 당신을 모른다. 당신 역시 물고기가 아니므로 물고기를 모른다. 이것이 논리의 완결이다."
이 짧은 대화가 『장자』 추수편에 기록된 호량 논변이다.
동아시아 철학사에서 타자(他者)의 내면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기록으로 꼽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쟁에서 누가 이겼는가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혜시의 논리는 정연하다.
당신이 물고기가 아니듯, 나 역시 당신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내면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이 구조는 무너지지 않는다.
장자는 논리에서 벗어나 질문 자체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혜시는 끝까지 논리의 땅을 지킨다.
두 사람은 이 방식으로 평생 싸웠다.
장자가 경계 밖으로 나가면, 혜시는 경계 안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장자가 비유로 날아오르면, 혜시는 정의로 붙잡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마찰이 두 사람 모두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논리가 현실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혜시의 삶이 보여준다.
혜시는 위 혜왕 치하에서 재상을 지내며 제나라, 초나라와 연합하는 합종(合從) 외교를 주도했다.
진나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가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외교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혜시는 개념과 개념 사이의 경계를 의심했던 사람이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도 그에게는 절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의(張儀)가 위나라에 들어왔다.
진나라가 보낸 종횡가였다.
장의의 전략은 혜시와 정반대였다.
여러 나라가 연합하는 대신 진나라와 각각 개별적으로 화친을 맺게 하는 연횡(連橫)이었다.
논리의 대결이 아니라 이익의 계산이었고, 당장의 현실이 먼 미래의 전략보다 강했다.
혜시는 재상직에서 밀려났다.
『전국책』과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초나라로 망명했고, 이후 송나라에서 활동한 흔적이 남아 있다.
다섯 수레를 채운 학문이 그를 지키지 못했다.
개념의 경계를 허무는 데 탁월했던 사람이 권력의 경계 앞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전국시대는 말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결국 힘의 시대였다.
혜시가 설계한 합종 연맹은 그의 퇴장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으나, 진나라의 팽창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장의가 펼친 연횡 전략이 더 오래, 더 넓게 퍼져나갔다.
망명지에서 혜시가 무엇을 썼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가 가지고 다닌 대나무 조각들이 어디에서 끝났는지도 알 수 없다.
『장자』 서무귀편에 짧은 장면이 있다.
장자가 혜시의 무덤 곁을 지나가다 멈추었다.
그는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영인(郢人)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코끝에 파리 날개만 한 흙을 묻혀 놓으면 석인(石人)이라는 장인이 도끼로 그것을 깎아냈다고 했다.
흙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고, 코도 상하지 않았다.
나중에 석인이 죽자, 영인은 다시는 그 기술을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
"나도 혜시가 죽은 뒤로는 대화할 상대가 없어졌다."
장자는 그렇게 말하고 지나갔다.
평생 논적이었다.
장자가 경계를 허물면 혜시가 세웠고, 혜시가 정의를 내리면 장자가 비틀었다.
그 긴장이 없어졌을 때, 장자는 더 이상 날카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칼을 벼리는 데는 칼이 필요하지 않다.
돌이 필요하다.
혜시의 사상은 그렇게 장자의 텍스트 안에서만 살아남았다.
그를 가장 자주 반박한 사람의 책 속에서, 그의 주장들이 조각조각 인용된 채로.
독립된 저술은 한 글자도 남지 않았다.
다섯 수레 가득 채운 대나무 조각들은 어느 창고에서 썩었거나, 어느 전쟁에서 불탔거나, 어느 망명지에서 흩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혜시를 아는 것은 온전히 장자 덕분이다.
그리고 장자가 혜시를 기록한 것은 반박하기 위해서였지,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반박들이 혜시를 살아남게 했다.
돌이 하얗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장자에게,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지 않느냐고 끝까지 물은 사람.
재상의 자리에서 쫓겨나 낯선 나라를 떠돌다 어딘가에서 죽은 사람.
그의 무덤 앞에 장자가 섰고, 더 이상 말할 상대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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