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조나라의 관문지기는 규정을 알고 있었다.
말은 통과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학자 한 명이 말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관문지기가 막아서자, 학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것은 말이 아닙니다.
흰 말입니다."
관문지기는 당황했다.
규정에는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흰 말'은 다른 것인가?
학자는 그 혼란의 틈을 타 관문을 통과했다.
그가 공손룡(公孫龍)이다.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장면 하나가 공손룡이 평생 붙들었던 질문을 압축한다.
'말'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흰 말'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같은가.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흰 말은 분명히 말이다.
그런데 '말'이라는 범주에는 흰 말도 있고, 검은 말도 있고, 붉은 말도 있다.
'흰 말'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검은 말과 붉은 말을 이미 제외했다.
반면 그냥 '말'이라고 부를 때는 색깔을 따지지 않는다.
범위가 다르다.
가리키는 것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름이 다르다.
공손룡의 논리는 여기서 시작했다.
'흰 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
이것은 억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름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조승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제나라의 맹상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과 함께 '전국사군자'로 불린 귀족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식객을 거느리는 것이었다.
식객이란 귀족의 집에 머물며 자신의 재능으로 후원에 보답하는 이들이다.
병법가, 자객, 요리사, 변사(辯士)가 섞여 살았다.
평원군의 식객은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공손룡은 그 식객 중 하나였다.
후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먹고 자는 걱정 없이 생각하고, 쓰고, 토론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평원군의 저택은 공손룡에게 일종의 연구소였다.
각국에서 모인 논객들이 공개 토론을 벌였고, 공손룡은 그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이론을 다듬었다.
그가 이 시기에 전개한 논변 중 하나가 '견백론(堅白論)'이다.
단단하고 흰 돌 하나를 놓고, 그 단단함과 흼이 과연 동시에 존재하는가를 묻는 논변이다.
이것은 나중에 따로 다루겠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간이 사람을 키운다는 점이다.
공손룡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만이 아니었다.
그 재능을 펼칠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평원군이 공손룡에게 손님을 소개했다.
공천(孔穿).
공자의 6대손이었다.
공자의 이름을 등에 업은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압박이었다.
유가의 권위를 빌려 공손룡의 논변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다.
공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흰 말이 말이 아니라는 설을 거두시오."
공손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공자를 인용했다.
공자가 초나라를 지날 때 한 아이와 문답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문답의 핵심은 이름을 제대로 쓰는 것, 즉 '정명(正名)'이었다.
공자는 평생 이름과 실재가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이름이 흐트러지면 말이 맞지 않고, 말이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공손룡의 반격은 간단했다.
"내가 하는 것이 바로 정명 아닙니까.
'말'과 '흰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다른데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야말로 이름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공천은 답하지 못했다.
《공손룡자》는 이 장면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공자의 후손이 공자의 논리로 무장한 낯선 논객에게 패배한 순간이었다.
이 대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같은 권위에 호소했다는 점이다.
공천도 공자를 내세웠고, 공손룡도 공자를 내세웠다.
그러나 공손룡의 인용이 더 정확했다.
권위보다 논리가 이긴 것이 아니라, 논리가 더 나은 논리에 진 것이었다.
탁자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자.
하얗고 단단한 돌이다.
우리는 이 돌에 대해 두 가지를 안다.
색깔: 희다.
촉감: 단단하다.
그런데 공손룡은 묻는다.
이 두 가지 속성이 과연 '동시에' 이 돌 안에 존재하는가.
눈을 감고 손으로 돌을 만져보라.
단단함은 느껴진다.
그러나 흼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뜨고 돌을 바라보라.
흼은 보인다.
그러나 단단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공손룡의 논증은 이렇다.
눈은 흼을 파악하지만 단단함을 알지 못한다.
손은 단단함을 파악하지만 흼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느 감각도 두 속성을 동시에 파악하지 못한다.
동시에 파악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단하고 흰 돌(堅白石)은 사실 '단단한 돌'과 '흰 돌' 두 개의 개념이 겹쳐 있는 것이지, 하나의 통합된 실재가 아니다.
이것을 견백론(堅白論)이라 한다.
현대 독자에게는 이 논변이 억지처럼 보일 수 있다.
당연히 단단하고 흰 돌은 하나의 돌 아닌가.
그런데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사과'라고 부를 때, 그것은 빨간 사과인가, 초록 사과인가, 달콤한 사과인가, 신 사과인가.
우리가 말하는 '사과'라는 개념 안에는 특정 색깔도, 특정 맛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 사과는 항상 어떤 색깔이고 어떤 맛을 가진다.
개념(이름)과 감각으로 파악되는 실재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공손룡은 그 간극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이 질문은 '보편자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유럽에서 스콜라 철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논쟁했던 바로 그 문제다.
'흼'이라는 속성은 개별 사물들 속에 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 정신이 만들어낸 추상인가.
공손룡이 그것을 전국시대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물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체계적 속성 분석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손룡의 논변은 당대에도 환영받지 못했다.
순자(荀子)는 그를 직접 겨냥해 비판했다.
"이름을 가지고 실재를 어지럽힌다(用名以亂實)."
말장난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었다.
순자의 비판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당시 명가(名家)의 논객 중에는 진짜 논리를 추구하는 이도 있었지만, 논쟁 자체를 즐기거나 상대를 말로 이기는 데만 집중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손룡이 관문을 통과한 일화가 보여주듯, 논변이 실용적 이득을 위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순자의 비판 이후 명가는 사실상 학문적으로 단절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명가를 소개하면서도 궤변의 학파라는 인상을 심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학문은 법가와 유가였다.
이름과 속성에 대한 정교한 분석은 황제의 서고에서 자리를 잃었다.
공손룡의 글은 전부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손룡자》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씨앗은 남았으나 싹이 트지 않았다.
약 2200년이 지난 뒤, 상황이 달라졌다.
20세기 초 중국의 학자들이 서양 철학과 논리학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공손룡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후광(胡適)과 풍우란(馮友蘭)은 공손룡의 논변이 서양 논리학의 개념 분석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단순한 궤변이 아니라, 동아시아 고유의 분석 철학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현대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손룡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흰 말'과 '말'이 서로 다른 외연(外延, extension)을 가진다는 것은 집합론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흰 말'의 집합은 '말'의 집합의 진부분집합이다.
두 집합이 다르므로, 두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다르다.
공손룡의 논변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가 그의 시대에는 없었을 뿐이다.
관문을 통과한 흰 말은 이미 사라졌다.
공손룡이 살았던 조나라도 진시황에게 멸망했다.
그러나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남았다.
그리고 그 문장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공손룡의 질문은 다시 살아난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들은 정말 같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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