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원전 536년 이전의 중국에서 법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귀족들의 머릿속에, 관습이라는 이름의 안개 속에.
백성은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몰랐다.
재판관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이 바뀔 수 있었고, 어제의 무죄가 오늘의 유죄가 될 수 있었다.
그 해, 자산(子產) 이 무언가를 했다.
정(鄭)나라의 재상이었던 그는 형법 조문을 청동 정(鼎)에 주조해 공개 장소에 세웠다.
솥 표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들.
누구나 와서 읽을 수 있었다.
어떤 행위가 어떤 벌을 받는지, 이제 돌에 새겨진 것처럼 명확해졌다.
이 소식이 진(晉)나라에 닿자 대부 숙향(叔向) 이 격노했다.
그는 자산에게 서신을 보냈다.
백성이 법조문을 알면 귀족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족의 재량으로 다스리는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그의 비난은 법의 공개가 단순한 행정 개혁이 아님을 정확히 꿰뚫었다.
법이 공개된다는 것은, 법의 해석 권력이 희석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법학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였다.
자산이 청동 솥에 법을 새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나라 어딘가에서 한 남자가 대나무를 깎고 있었다.
대나무를 얇게 잘라 죽간(竹簡)을 만들고, 붓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는 작업.
국가가 청동에 새긴 것에 대응해, 그는 대나무에 대안을 썼다.
그의 이름은 등석(鄧析) 이었다.
등석은 자산의 형법이 가진 허점과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다른 해석과 대안적 논리를 제시했다.
이 죽간 묶음을 후대는 죽형(竹刑) 이라 불렀다.
개인이 국가의 법률에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그것을 문서로 정리해 배포한 사례가 기록에 남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국가의 입법 독점에 정면으로 달려든 셈이었다.
물론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당시 정나라 조정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개인이 공식 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문서를 퍼뜨리고 다니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등석은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법적 논리가 옳고 그름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등석이 한 일은 죽형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성에게 소송 기술을 가르쳤다.
나쁜 관습이나 불공정한 판결에 맞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방법, 논리적으로 주장을 구성하는 방법.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 수업료를 이렇게 기록한다.
큰 사건이면 옷 한 벌, 작은 사건이면 바지 한 벌.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법률 교육 사업이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정나라 조정에 소송이 폭증했다.
『여씨춘추』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이 벌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 혼란의 성격을 생각해볼 만하다.
원래 조용했던 것은 억압되었기 때문에 조용한 것이었다.
법을 모르면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이름 붙이지도 못한다.
등석이 백성에게 언어를 가르쳤더니, 그들이 말을 시작했다.
조정의 입장에서 그것은 혼란이었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등석에게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가 있다.
그 이야기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정나라를 흐르는 위수(洧水) 에서 사람이 익사했다.
시신을 건진 자가 있었는데, 그는 유족에게 거액을 요구했다.
유족은 등석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등석의 답은 간단했다.
기다려라.
그 시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팔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얼마 후, 시신을 가진 자도 등석을 찾아왔다.
가족이 돈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등석의 답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기다려라.
가족이 다른 곳에서 시신을 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양쪽 모두에게 똑같은 논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불쾌하다.
도덕적으로 뻔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 멈춰 보면, 그가 한 것은 논리 자체를 해부해 보인 것이다.
하나의 논리 구조가 어떻게 반대 방향으로도 동등하게 작동하는지를.
그것이 궤변인지 아니면 통찰인지는, 지금도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는 사람들이 논리라고 믿는 것이 실은 얼마나 방향성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실연해 보인 셈이기도 했다.
역사는 그를 결국 궤변가(詭辯家)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 분류 자체가 권력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기원전 501년.
자산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사천(駟歂) 이 정나라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석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유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맥락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소송을 가르치고, 국가 법률에 반론을 제기하는 문서를 만들고, 양측 모두에 유리한 논변을 팔아 조정을 혼란에 빠뜨린 인물.
사천은 그를 제거했다.
그런데 『여씨춘추』에는 이 사건에 관한 문장이 하나 더 있다.
"殺鄧析而用其竹刑"
등석을 죽이고, 그의 죽형을 썼다(採用했다).
이 열두 글자는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설명을 요구한다.
국가가 위험인물로 판정해 처형한 사람.
그 사람이 죽은 뒤, 국가는 그가 만든 법전을 공식 채택했다.
그의 죽음이 그의 법률적 작업의 가치를 무효화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 자신이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이 내린 사형 선고의 근거를 스스로 허물었다.
사천이 등석을 제거한 이유가 그의 법률 지식이 아니라 그의 파급력이었다고 한다면, 이 채택은 더욱 이상하게 읽힌다.
죽형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법률 체계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채택했다면, 등석은 처음부터 제거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읽어도 마찬가지다.
제거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면, 그의 작업물은 채택되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역사는 두 가지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처형과 채택.
이 기록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등석의 죽형이 개인의 기이한 법률 놀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대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했던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국가는 그 필요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든 사람을 지우고, 내용물을 가져갔다.
역사에서 이런 방식은 낯설지 않다.
위험한 사람을 없애고, 위험하지 않게 정리된 그의 유산을 흡수하는 것.
그 과정에서 원본이 가졌던 날이 무뎌지고, 맥락이 지워진다.
등석의 경우는 그 패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드물다.
"죽이고 썼다"는 문장이 그 모순을 덮지 않고, 오히려 밑줄을 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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