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1838년, 시바라트리 밤이었다.
힌두교에서 시바라트리는 일 년 중 가장 신성한 밤 가운데 하나다.
신도들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시바 신 앞에 등불을 밝히며 기도한다.
구자라트의 작은 마을에서도 신전 안은 열기로 가득 찼고, 열네 살 소년 물 샹카르도 그 안에 있었다.
소년의 집안은 독실한 브라만 가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베다를 외우고 신에게 헌신하며 살기를 바랐다.
물 샹카르도 그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적어도 그날 밤까지는.
철야 예배가 깊어지던 무렵, 시바 링감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쥐 한 마리였다.
쥐는 두려움 없이 돌 위를 기어다녔다.
그리고 신도들이 바친 우유와 꽃, 제물을 하나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신전 안의 어른들은 기도에 집중하거나 졸음에 겨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도 그 광경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년의 눈은 쥐를 따라갔다.
그리고 멈췄다.
돌로 깎인 시바 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앞에 바쳐진 제물 위로 쥐가 올라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머릿속에 하나의 질문이 박혔다.
'이 돌이 정말 신이라면, 왜 쥐 한 마리조차 쫓지 못하는가.'
이후 여동생이 죽었다.
삼촌도 죽었다.
죽음이 연달아 찾아오는 것을 보며 소년은 집을 떠나기로 했다.
신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 집도 이름도 버리고 출가했다.
출가 이후 수십 년이 흘렀다.
물 샹카르는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산스크리트를 익히고 베다를 파고들었다.
그 세월 끝에 그가 마투라에서 찾아간 스승은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이었다.
스와미 비르자난드.
그는 시력을 잃었지만 산스크리트 문법과 베다 원전에 관한 한 인도에서 손꼽히는 학자였다.
그의 교실에는 교재가 없었다.
칠판도 없었다.
스승이 입으로 읊으면 제자가 귀로 받아 머릿속에 새기는 방식이었다.
1860년 무렵, 물 샹카르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3년간 그는 아무것도 받아 적지 않고 오직 외우고 또 외웠다.
문법의 규칙, 경전의 구절, 고대 주석의 논리.
수학이 끝나던 날, 스승은 제자에게 선물을 요구했다.
인도에서는 이를 구루다크시나라고 부른다.
스승이 요구하는 마지막 봉헌이다.
돈이나 물건이 아니어도 된다.
서약이어도 된다.
비르자난드가 요구한 것은 이것이었다.
"후대에 덧붙여진 모든 미신을 걷어내고, 베다의 원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라."
제자는 서약했다.
이날부터 물 샹카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다야난다 사라스와티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
힌두교에서 바라나시, 즉 카시는 성스러운 도시 가운데 성스러운 도시다.
갠지스 강이 휘감고 도는 이 도시에는 수천 개의 사원이 있고, 수백 명의 브라만 학자가 산다.
이곳에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바티칸에서 교황이 틀렸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1869년, 다야난다는 이 도시로 들어갔다.
300명이 넘는 정통 힌두 학자들이 모였다.
판디트라 불리는 이들은 베다와 경전을 수십 년씩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다야난다는 한 가지 주장을 꺼내들었다.
베다 원전 어디에도 우상을 만들어 예배하라는 근거가 없다.
청중은 즉시 술렁였다.
그는 구절을 하나씩 제시하며 반박했다.
학자들은 반론을 내놓았고, 다야난다는 다시 원전을 인용하며 받아쳤다.
토론은 야유와 위협 속에 결렬되었다.
합의는 없었다.
승자도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전국에 보도되었다.
성지의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전통 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인물이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인도 전역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다야난다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보다, 그가 그 장소에서 그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건이었다.
공개 토론은 그때그때 사라진다.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하지만 책은 남는다.
1875년, 다야난다는 《사티아르트 프라카시》를 출판했다.
제목을 풀면 '진리의 빛'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산스크리트가 아닌 힌디어로 쓰였다.
산스크리트는 브라만 학자들의 언어였다.
힌디어는 시장의 언어, 농부의 언어, 여성의 언어였다.
책을 힌디어로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독자를 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설정한다는 뜻이었다.
둘째, 이 책은 안과 밖을 동시에 비판했다.
안을 향해서는 힌두교 내부의 관행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카스트가 혈통으로 세습되는 것, 어린 나이에 혼인을 강제하는 것,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함께 불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티 풍습.
다야난다는 이것들이 베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밖을 향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를 장별로 반박했다.
그는 힌두교가 우월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세 종교 모두 원전을 오해하거나 권력자들에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인도에서 이런 책은 없었다.
같은 해 봄베이에서 아리아 사마지를 창립했다.
여성 교육과 과부 재혼을 공식 강령으로 채택했다.
과부는 재혼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다야난다는 그 상식을 강령으로 뒤집었다.
다야난다의 명성은 결국 왕의 초청장을 불러왔다.
1883년, 라자스탄의 조드푸르 마하라자 자스완트 싱 2세가 그를 궁정으로 초대했다.
왕들이 성자를 초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왕은 축복을 얻고, 성자는 후원을 얻는다.
그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다야난다는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왕이 무희 난히 잔과 지나치게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손님이 주인을 비판했다.
성자가 왕을 꾸짖었다.
궁정의 질서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의 우유에 이물질이 섞였다.
유리 가루가 든 독이었다고 전해진다.
요리사 자그나트가 실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야난다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수주를 버텼다.
하지만 고통은 계속되었고, 그해 10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예순 무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창립자가 죽으면 조직은 대개 흔들린다.
하지만 아리아 사마지는 달랐다.
다야난다의 죽음 이후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의 사상은 인도 독립운동의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열네 살 소년이 쥐 한 마리를 바라보며 품었던 의문 하나가, 수십 년을 지나 그런 자리에 닿았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