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1843년 무렵, 벵골의 작은 마을 캄아르푸쿠르에 가다다르 차토파디아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소년은 논밭 사이 좁은 흙길을 걷고 있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그 어두운 배경 위로 백로 떼가 한 줄기 흰 선을 그으며 날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구름과 새.
그런데 소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흔들어 깨웠을 때 소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를 보았다고만 했다.
기록에는 이 사건이 그의 첫 번째 삼매(사마디) 경험으로 남아 있다.
삼매란 의식이 일상의 경계를 넘어 다른 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설명은 없었다.
그들이 본 것은 그냥 쓰러지는 아이였다.
이 일이 한 번이었다면 이상한 날로 잊혔겠지만, 반복되었다.
신상(神像) 앞에서, 축제 연극을 보다가, 갑자기.
의사들은 간질을 의심했고, 이웃들은 정신병을 의심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무언가가 씌었다고 생각했다.
그 소년은 훗날 라마크리슈나로 불리게 된다.
1855년, 캘커타 북쪽 후글리 강가에 다크시네슈와르 칼리 사원이 완공되었다.
라마크리슈나는 그 사원의 사제가 되었다.
칼리는 힌두교의 여신이다.
검은 피부, 해골 목걸이, 혀를 내민 얼굴.
서양화 속 이미지로만 접하면 공포스럽게 보이지만, 벵골 신앙에서 칼리는 시간과 변화와 파괴를 통해 해방을 주는 어머니 신이다.
라마크리슈나에게 칼리는 그냥 신이 아니었다.
어머니였다.
그는 칼리의 현현을 원했다.
신학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마주치는 경험으로서.
기도를 했고, 통곡을 했고, 음식을 거부했다.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는 점점 벼랑 끝에 몰렸다.
어느 날 밤, 그는 사원 벽에 걸린 제의용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기록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후일 제자들에게 증언한 바로는, 온 세상이 '빛의 바다'로 가득 찼다.
최초의 칼리 환시였다.
이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자 각자의 몫이다.
신앙의 언어로 읽을 수도 있고, 심리의 언어로 읽을 수도 있다.
다만 기록된 사실은 이렇다: 그는 죽으려 했고, 그 경계에서 무언가를 경험했고, 평생 그 경험을 증언했다.
그 이후 그는 달라졌다.
삼매 상태가 더 빈번해졌고, 더 깊어졌다.
신상 앞에 서면 울었고, 꽃을 들면 황홀경에 빠졌고, 어떤 날은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며칠을 보냈다.
그의 몸은 점점 그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점점 더 그것을 향해 열려갔다.
1866년 무렵, 라마크리슈나는 힌두 사원 출입을 스스로 중단했다.
고빈다 로이라는 수피 수행자가 찾아왔다.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이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도와 명상과 금욕을 실천하는 흐름인데, 힌두교의 수행 전통과 닮은 구석이 많다.
고빈다 로이는 라마크리슈나에게 이슬람 방식으로 수행해볼 것을 권했다.
라마크리슈나는 받아들였다.
무슬림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하루 다섯 번 살라트를 수행했다.
힌두교 의례를 완전히 중단했다.
3일째 되던 날,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환시를 보았다고 기록된다.
이 이야기가 놀라운 이유는 단순히 힌두 사제가 이슬람을 실천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19세기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긴장이 상존하던 시대에, 그 사제가 타 종교의 수행을 '실험'처럼 수행했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실험은 이슬람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기독교 수행에서도 그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환시를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이 체험들을 통해 그는 하나의 명제를 확신하게 되었다.
모든 종교는 같은 신에 이른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주장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이 명제를 철학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었다.
직접 각각의 길을 걸어서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게 그의 증언이 가진 특이한 무게다.
1881년 11월, 캘커타의 한 대학생이 다크시네슈와르를 찾아왔다.
나렌드라나트 다타.
후일 비베카난다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될 인물이다.
당시 그는 브라흐마 사마지라는 힌두 개혁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서구적 감수성을 가진 청년이었다.
논리를 중시했고, 신비를 의심했고, 종교적 주장에는 증거를 요구했다.
그가 라마크리슈나 앞에 서서 물었다.
"신을 본 적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당시 누구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교리를 말했고, 수행자들은 경전을 인용했다.
경험의 언어로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라마크리슈나가 답했다.
"있다. 너를 보듯이 본다. 다만 더 강렬하게."
단호하고 단순한 문장이었다.
나렌드라나트는 그것을 들었다.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라마크리슈나가 청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렌드라나트는 후일 이 순간을 이렇게 기술했다: 자아가 소멸하는 듯한 경험이었다고.
바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이 만남이 두 사람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후 나렌드라나트는 라마크리슈나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이 죽은 뒤 그 가르침을 인도 밖으로 가져갔다.
1893년 시카고 세계 종교 의회에서 비베카난다는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은 힌두 사상이 서양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소개된 사건으로 기록된다.
모든 것은 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신을 본 적 있습니까?"
1885년, 라마크리슈나는 인후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은 말했다.
삼매 상태에 들어갈 때마다 종양 부위에서 출혈이 악화된다.
종교적 담론도 금지해야 한다.
그것이 치료의 조건이다.
그는 캘커타 코시포르의 한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자들이 교대로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가면서도 말을 했다.
제자들이 찾아오면 가르쳤다.
삼매에 들 때마다 목에서 피가 났다.
의사들의 금지 명령은 그의 몸 안에서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것이 의지였는지, 아니면 그의 몸이 이미 그 경계 너머에 있었던 것인지, 말하기 어렵다.
그는 단지 계속했다.
1886년 8월 15일 밤.
그는 세 번 칼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삼매에 들어갔다.
제자들은 이 죽음을 마하사마디라고 기록했다.
수행자가 의식적으로 들어간 마지막 삼매라는 의미다.
그가 죽은 것인지, 떠난 것인지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기록이 남긴 것은 이것이다.
논밭 사잇길에서 쓰러진 소년이, 칼을 목에 댔던 사제가, 모스크에서 무릎을 꿇었던 힌두교인이, 암으로 목이 무너져가는 중에도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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