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강변에서 아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 구출이나 조난을 떠올린다.
1909년 인도 아디야르 강변에서 일어난 일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찰스 리드비터는 신지학회의 간부였다.
신지학회는 당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영적 운동 단체였는데,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신비주의를 뒤섞어 '인류의 스승'이 곧 지상에 올 것이라 믿었다.
리드비터는 그 스승이 실제 인간의 몸을 빌려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고, 따라서 그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다.
그날 강변에서 그는 열네 살 소년 하나를 눈여겨봤다.
삐쩍 마르고 눈이 유독 크고 조용한 아이였다.
리드비터는 동료에게 말했다. 저 소년의 오라가 특별하다고.
오라란 사람 주변에 에너지장이 감지된다는 신지학회의 믿음이었지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리드비터의 눈길이 그 소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소년의 이름은 크리슈나무르티였다.
아버지 나라야니아는 신지학회의 하급 직원이었다.
리드비터가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자, 나라야니아는 아들을 조직에 넘기는 조건으로 재정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영국으로 건너가 신지학회가 설계한 교육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어떤 소년도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이 어떤 조직이나 믿음에서 이탈하는 데는 보통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지적 의심이 쌓여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의 충격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집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그 충격은 1925년에 왔다.
그는 동생 니티아난다를 거의 아버지처럼 돌봤다.
두 소년은 함께 영국으로 보내졌고, 낯선 땅에서 서로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니티아난다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신지학회 지도자들은 예언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세계의 스승을 보필할 동생이 그런 병으로 죽을 리 없다고, 그들은 믿었거나 믿는 척했다.
니티아난다는 캘리포니아 오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훗날 그날 밤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언이 틀렸다는 사실이 그를 흔든 것이 아니었다.
예언이라는 구조 자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말해주고 그것을 진리라 부르는 구조 자체가 그의 눈에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의 손을 잡고 밤을 보낸 남자에게, 어떤 조직의 어떤 권위도 그 죽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추종자들 앞에서 흔히 하는 것이 있다.
기적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복음을 선포하거나, 더 많은 헌신을 요청하거나.
1929년 8월 3일, 네덜란드 오멘의 야외 캠프에 모인 3천 명은 그중 어느 것도 기대했다.
연단에 선 크리슈나무르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메시아였다.
신지학회는 그를 위해 '별의 교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전 세계에 지부를 뒀으며, 성지와 재산과 기금을 그의 이름으로 쌓아뒀다.
그 조직에 속했다는 것은 다가오는 세계의 스승에게 미리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였다.
그는 말했다.
"진리는 길 없는 땅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는 계속했다. 어떤 조직도, 어떤 종파도, 어떤 종교도 인간을 진리로 인도할 수 없다고.
진리는 그런 식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별의 교단을 공식 해산했다.
성과 재산과 기금은 모두 반납했다.
청중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울었다고 전해진다.
분노한 사람도 있었고, 어리둥절한 사람도 있었다.
신지학회의 지도자 애니 베전트는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의 프로젝트가, 그것도 프로젝트의 주인공 스스로에 의해, 단 하나의 강연으로 끝났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 이후에도 강연을 계속했다.
다만 이제 그는 어떤 조직도 대표하지 않았고, 어떤 교단도 이끌지 않았으며,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남은 생애 내내 그렇게 살았다.
우리는 보통 과학자와 철학자가 대화하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61년 처음 만난 크리슈나무르티와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관계는 그 틀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봄은 양자역학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우주의 현상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펼쳐진 질서' 아래 '암묵적 질서'가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물리학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가 관찰하는 입자들은 더 깊은 전체성의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비슷한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자기 자신을 관찰자와 관찰 대상으로 분리할 때 모든 갈등이 시작된다고 봤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경계가 실제로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통찰.
둘의 대화는 녹음되고 출판됐다.
봄은 크리슈나무르티의 관찰이 자신의 이론과 공명한다고 말했다.
과학자와 철학자가 서로의 언어를 통역 없이 이해하는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대화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단절됐다.
어떤 이유로 갈라섰는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수십 년의 교환도 끝이 있었고, 그 끝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게 어쩌면 이 두 사람이 공유했던 가장 솔직한 사실인지도 모른다.
모든 만남에는 균열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1986년 1월 4일, 인도 마드라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날 자신이 마지막으로 공개 강연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췌장암이 이미 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와 함께 이 가르침도 끝난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신을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고.
오십 년 넘게 같은 말을 해왔지만, 마지막 강연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가장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러니 나를 따르지 마라.
한 달 뒤, 그는 오하이에서 사망했다.
그가 세운 학교들은 지금도 운영된다.
인도, 영국, 미국에 여러 곳이 있다.
교주가 없는 학교들이다.
창립자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의 이름으로 의식을 치르지 않는다.
그가 반복해서 경고했던 바로 그것, 누군가를 권위로 삼아 그 뒤에 줄서는 일을 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그의 의자는 비어 있다.
그게 그가 원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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