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어느 시대에나 스파이는 두 가지 위험을 안고 산다.
들킬 위험, 그리고 너무 깊이 들어가 버릴 위험.
쿠마릴라 바타는 7세기 인도, 당대 세계 최고의 지식 요새 날란다에 잠입했다.
브라만으로 태어난 그가 브라만 신분을 숨기고 불교 학문의 심장부에 들어간 것이다.
날란다는 지금의 비하르 주 땅에 있었다.
수천 명의 학승이 모여 불교 철학과 논리학을 연마하는, 당시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지성의 집결지였다.
그는 거기서 수 년을 보냈다.
강의를 들었고, 논문을 읽었고, 논쟁에 참여했다.
아마 어떤 스승은 그를 아꼈을 것이다.
어떤 동학은 그와 밤새 토론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승은 어느 날 강의실에서 균열이 생겼다고 말한다.
쿠마릴라가 불교 교리에 대한 의심을 드러낸 것이다.
발각된 그는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
살았다.
그러나 한쪽 눈을 잃었다.
그 눈 하나로 그는 이후 평생 글을 썼다.
날란다에서 배운 모든 것을 무기로 삼아.
여기서 잠깐 싸움의 판을 이해해야 한다.
종교와 철학에서 '권위'란 곧 '왜 이것을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법정으로 치면 증거 능력이다.
불교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풀었다.
붓다는 깨달은 자다.
깨달은 자는 착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붓다의 말은 믿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깔끔하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 구조는 붓다라는 '인물'에 의존한다.
그 인물의 신뢰성이 흔들리면 경전 전체가 흔들린다.
아파우루셰야.
'저자가 없음'이라는 뜻이다.
쿠마릴라는 주저 『슬로카바르티카』에서 베다는 인간이 지은 책이 아니라고 논증했다.
누군가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자의 오류나 편견이 끼어들 수 없다.
저자 없는 텍스트는 인간 인식의 한계 바깥에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진다.
불교는 '믿을 만한 저자'를 세웠다.
쿠마릴라는 '저자 자체를 없앴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다.
지식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라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그리고 쿠마릴라는 불교가 그 물음에 답하는 방식의 구조적 취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날란다에서 직접 배웠으니까.
검술에서 가장 무서운 상대는 같은 유파를 배운 자다.
어디서 치고, 어디가 비는지 안다.
쿠마릴라의 공격은 그런 성격이었다.
불교 인식론의 거인들, 디그나가와 다르마키르티는 수 세기에 걸쳐 정교한 지식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그 체계의 두 기둥이 있었다.
하나는 '스바삼베다나', 자기 인식이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할 때 동시에 자기 자신도 인식한다는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아포하', 배제를 통한 의미론이다.
'소'라는 개념은 소가 무엇인지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 아닌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이론이다.
쿠마릴라는 이 두 이론을 불교 자신의 논리로 공격했다.
자기 인식 이론을 예로 들면 이렇다.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면, 하나의 행위가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말이다.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있는가.
쿠마릴라는 이 구조의 모순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외부에서 불교가 틀렸다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불교 내부의 전제들이 서로 충돌함을 보인 것이다.
날란다에서 몇 년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 수준의 해부는 불가능했다.
그는 스승들에게서 칼을 배웠고, 그 칼로 스승들의 세계를 잘랐다.
전쟁에서 이긴 자가 항상 편히 자는 것은 아니다.
쿠마릴라는 말년에 왕겨불 위에 올라갔다.
왕겨는 천천히 탄다.
빠르게 타오르지 않고, 서서히 안에서부터 몸을 태운다.
그가 택한 고행의 방식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날란다의 스승을 기만한 죄.
평생을 불교 철학과 싸운 사람이 결국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논쟁의 패배가 아니었다.
사람을 속인 것이었다.
스승을 믿게 하고, 그 신뢰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 죗값을 자신이 직접 치르겠다는 결정이었다.
바로 그 무렵, 샹카라차르야가 찾아왔다.
샹카라는 아드바이타 베단타, 즉 '오직 하나의 브라만만이 실재한다'는 철학의 거인이었다.
그는 쿠마릴라와 논쟁하고 싶었다.
미맘사와 베단타는 같은 베다 전통 안에 있으면서도 핵심에서 갈렸다.
미맘사는 베다의 의례와 실천을 중심에 놓았고, 베단타는 앎과 해탈을 중심에 놓았다.
두 거인의 대결이 펼쳐질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은 이미 타고 있었다.
쿠마릴라는 논쟁을 거절했다.
자신은 이미 속죄의 과정 중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제자 만다나 미슈라를 찾아가라.
샹카라는 발길을 돌렸다.
불길 위에 앉은 노학자를 뒤에 두고.
역사는 종종 아이러니로 결말을 맺는다.
샹카라는 만다나 미슈라를 찾아갔고, 길고 치열한 논쟁 끝에 이겼다.
전승에 따르면 만다나 미슈라는 패배를 인정하고 샹카라의 제자가 되었다.
쿠마릴라의 제자가, 쿠마릴라와 대결하려 했던 사람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맘사의 계보는 역설적으로 베단타 전통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더 큰 그림에서 보면, 쿠마릴라 바타 이후 인도 아대륙에서 불교의 위상은 달라졌다.
논쟁의 중심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그 자리를 미맘사와 베단타가 채웠다.
브라만 정통 철학의 두 축이 자리를 잡았다.
물론 불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쿠마릴라가 세운 인식론적 전선, 즉 '베다는 저자가 없으므로 그 권위는 인간의 신뢰성 문제와 무관하다'는 논증은, 이후 수백 년 인도 철학 논쟁의 지형을 구조화했다.
잠입자 한 명이 배워 온 것들이 그렇게 쓰였다.
쿠마릴라가 왕겨불을 택한 것이 속죄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시작한 것들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의 침묵이었는지,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불 위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논증이 아니라 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신 대신 싸울 사람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논리는 계속됐다.
불이 꺼진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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