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수수께끼 같은 글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글.
그런데 그 느낌 자체가 바로 저자가 의도한 것이라면?
나가르주나는 2세기 인도 철학자다.
그는 『중론(中論)』이라 불리는 텍스트를 남겼다.
산스크리트 원제는 뮬라마디야마카카리카 — 직역하면 '근본 중관 게송들.'
스물일곱 장, 총 사백여 게송의 운문.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딱 하나다.
어떤 것도 자성(自性), 즉 고유하고 독립적인 본질을 갖지 않는다.
비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불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보자.
불꽃은 연료 없이 존재할 수 있나.
연료는 산소 없이 탈 수 있나.
산소는 분자 구조 없이 존재할 수 있나.
불꽃은 '그 자체로' 불꽃인 무언가가 아니다.
조건들의 그물망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이다.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공(空)이란 이것이다 — 어떤 것도 그 그물망 바깥에 서 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장은 폭발물을 담은 상자처럼 생겼다.
열기가 두렵고, 안 열면 이해할 수가 없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이 논증을 열두 방향에서 반복했다.
원인, 움직임, 시간, 불, 결합, 감각, 자아... 어떤 주제를 들이대도 같은 결론에 닿는다.
문제는 이 텍스트가 지나치게 간결하다는 것이었다.
게송 하나가 한 줄짜리 수수께끼처럼 읽혔다.
어떤 사람은 이 텍스트를 읽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를 읽어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언어를 초월한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신비주의를 읽어냈다.
나가르주나는 죽었고, 스물일곱 장의 폭탄은 그대로 남아 수백 년간 불교 내부를 흔들었다.
5세기 무렵, 『중론』을 해석하는 두 승려가 있었다.
한 명은 붓다팔리타, 다른 한 명은 바비베카다.
둘 다 나가르주나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런데 같은 텍스트를 읽고 정반대의 방법론을 꺼내들었다.
붓다팔리타의 방법은 이렇다.
상대방이 "A는 자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을 전제로 삼아 논리를 전개한다.
그 전제에서 모순이 터져 나오는 순간, 논증은 끝난다.
상대방 자신의 말로 자신을 반박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귀류법, 산스크리트로 프라상가다.
"당신의 전제대로라면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 어떻게 할 것인가?"
바비베카는 이 방법이 불충분하다고 봤다.
귀류법은 상대방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진실을 확립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관학파가 자신의 고유한 논리적 전제 위에서 독자적인 논증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스바탄트라, 독립 추론이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붓다팔리타의 방식은 상대방이 쌓은 모래성을 발로 걷어차는 것이다.
바비베카는 말한다 — 모래성을 걷어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더 단단한 성을 직접 지어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가.
이 질문은 200년 넘게 답을 얻지 못했다.
두 방법론은 같은 이름의 학파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갈라진 채로 공존했다.
주석은 주석을 낳고, 반박은 반박을 낳았다.
그러다 7세기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찬드라키르티는 나란다 대학의 승려였다.
나란다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지식의 집산지였다.
수천 명의 학자가 머물며 논쟁하고, 필사하고, 강의했다.
찬드라키르티가 손에 쥔 문제는 명확했다.
바비베카가 붓다팔리타를 공격한 지 약 100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프라산나파다 — '명쾌한 말'이라는 뜻의 텍스트 — 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중론』의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전체를 주석한 유일한 산스크리트 주석이다.
다른 주석들은 일부만 다뤘거나, 핵심 논쟁을 비껴갔다.
찬드라키르티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바비베카의 주장을 정면에서 받아쳤다.
독립 추론을 세우려면 두 논쟁자 사이에 공유된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空)을 논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 전제'를 가져올 수 있는가.
그 공통 전제 자체가 이미 어떤 고유한 속성을 가진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바비베카가 독립 추론을 요구할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성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것이 찬드라키르티의 핵심 반격이었다.
귀류법이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더 약해서가 아니라, 더 솔직하기 때문이다.
귀류법은 자신의 논리적 전제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 대신 상대방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 그 언어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보여준다.
붓다팔리타의 복권이었다.
200년 만에 귀류법이 공식적으로 복원된 것이다.
그런데 찬드라키르티가 상대한 것은 바비베카만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에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유식학파(唯識學派)다.
유식학파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의식만이 실재한다."
이것은 얼핏 과격하게 들리지만, 사실 상당한 직관적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과'를 경험할 때, 우리가 실제로 접촉하는 것은 사과 자체인가, 아니면 사과에 대한 감각 경험인가.
색깔은 빛의 파장이고, 단맛은 수용체의 반응이다.
결국 우리는 세계를 직접 보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표상을 볼 뿐이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 자체는 필요한 가설인가.
유식학파는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었다.
그리고 의식 자체는 — 비록 그것이 어떤 고유한 속성을 갖는 방식이지만 — 실재한다고 했다.
찬드라키르티는 마디야마카바타라, 즉 『입중론(入中論)』의 제6장에서 이 주장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의 반박은 꿈의 비유를 이용한다.
꿈에서 당신은 고통을 경험한다.
꿈속의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학파는 여기서 말한다 — 봐라, 외부 대상 없이도 경험이 성립한다, 따라서 의식이 진짜다.
찬드라키르티는 뒤집는다.
꿈속의 의식 자체는 실재하는가.
꿈에서 깨어나면 그 의식도 사라진다.
꿈속의 고통이 '실제 고통'이 아니듯, 꿈속의 의식 역시 자성을 가진 실재가 아니다.
의식을 피난처로 삼아 외부 대상의 공(空)을 논하는 것은, 구멍 난 배에서 갑판을 피해 선실로 도망치는 것과 같다.
물은 선실에도 들어온다.
『입중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 반박만이 아니다.
이 텍스트는 보살의 수행 단계인 십지(十地) 구조 위에 중관 철학을 배치했다.
수행론과 인식론이 하나의 틀 안에서 결합된 것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과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은 최초의 시도였다.
이전까지 중관학파의 텍스트는 주로 논쟁 상대를 반박하는 데 집중했다.
찬드라키르티는 반박을 수행의 지도와 연결했다.
12세기 후반, 나란다 대학이 파괴되었다.
수십만 권의 필사본이 불탔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주석과 논쟁이 연기가 됐다.
인도에서 중관학파의 산스크리트 전통은 그렇게 단절됐다.
그런데 찬드라키르티의 텍스트는 살아남았다.
히말라야 너머에서.
7세기부터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는 번역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티베트 왕실과 승단은 인도 불교 텍스트를 티베트어로 옮기는 데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사라진 자리에서, 티베트어 번역본이 원전을 대신했다.
14세기, 총카파가 등장한다.
그는 티베트 불교를 개혁한 인물이다.
겔룩파(황교)를 창시하고,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의 기반이 된 전통을 세웠다.
총카파는 『입중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찬드라키르티의 귀류 중관이 나가르주나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해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 입장을 겔룩파 철학 교육의 중심에 놓았다.
오늘날 달라이 라마가 공(空)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틀이 바로 이 계보에서 나왔다.
인도에서 시작된 논쟁이 산스크리트 필사본이 재가 된 뒤에도, 히말라야 너머 또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림 속 소에서 우유를 짜낼 수 없다.
이것은 찬드라키르티가 바비베카를 비판할 때 사용한 비유로 전해진다.
독자적인 논증의 전제는 공통된 지시 대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자성이 없는 세계에서, 두 논쟁자가 가리키는 '같은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림 속 소를 가리키며 우유를 요구하는 셈이다.
한 승려가 쓴 두 텍스트가, 수백 년이 지난 뒤 불탄 대학의 폐허를 건너,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티베트 사원에서는 스무 살 청년 승려가 『입중론』 제6장을 앞에 놓고 씨름한다.
찬드라키르티가 1400년 전 나란다에서 씨름했던 바로 그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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