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7세기 인도에서 브라만 가문에 태어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최상위 명문대 입학을 출생과 동시에 보장받는 것과 비슷했다.
베다를 외우고, 제식을 익히고, 논리학을 배우는 그 교육 체계는 수천 년 동안 인도 지식인의 뼈대를 만들어 왔다.
다르마키르티는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인도 트리말라야 근방으로 추정되는 곳,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7세기 초 무렵의 일이다.
그가 받은 교육은 탄탄했다.
산스크리트 문법, 베다 성전, 니야야 학파의 논리학.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는 그 길을 벗어났다.
불교 승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그가 찾아간 곳이 나란다 계열 승원이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그곳에서 그는 이슈바라세나를 스승으로 만났다.
이슈바라세나는 디그나가의 직계 제자였다.
디그나가는 불교 논리학을 사실상 새로 세운 사람이었다.
이슈바라세나에게서 디그나가의 주저 『프라마나삼웃차야』를 배우면서, 다르마키르티는 불편한 것을 발견했다.
스승의 해석이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짚지 못하는 대목들이 있었다.
제자가 스승의 해석을 틀렸다고 판단하는 것.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을 출발점 삼아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
다르마키르티가 걸어간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을 철학자들은 수천 년째 붙들고 있다.
인도 철학에서는 이것을 '프라마나(pramāṇa)', 즉 유효한 인식 수단의 문제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알아야 진짜로 아는 것인가.
다르마키르티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각(pratyakṣa)과 추론(anumāna), 딱 두 가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직접적인 경험.
그리고 이미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을 논리적으로 끌어내는 추론.
이 두 가지 말고는 없다.
당시 인도 철학계의 다른 학파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바이셰시카 학파와 니야야 학파는 비유(upamāna)를 독립적인 인식 수단으로 쳤다.
증언(śabda), 즉 믿을 만한 사람의 말도 앎의 정당한 경로라고 했다.
특히 미맘사 학파에게 증언은 베다를 뜻했다. 베다의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의 근거였다.
다르마키르티는 이것들을 하나씩 논파했다.
비유는 결국 지각과 추론의 조합이다.
증언은 그 증언을 한 사람의 신뢰성을 추론으로 확인해야만 유효하다.
독립적인 인식 수단이 아니라 파생물이다.
그가 남긴 일곱 편의 논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프라마나바르띠카』다.
이 책에서 그는 디그나가의 체계를 계승하되, 빈틈을 메우고 논증을 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그중에서도 '아포하(apoha)' 이론은 특별히 정교하다.
아포하는 '배제'를 뜻한다.
우리가 '소'라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플라톤이라면 '소다움'이라는 보편적인 형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르마키르티는 보편자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렇다.
'소'라는 말은 소가 아닌 것들을 모두 배제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말이 긍정적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보편자 없이 언어를 설명하는 이 구조는, 이후 천 년 넘게 철학자들이 씨름할 문제의 씨앗이었다.
고대 인도의 공개 논쟁은 단순한 학술 토론이 아니었다.
진 쪽이 이긴 쪽의 제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개종까지 해야 했다.
관중이 보는 앞에서 왕이나 귀족의 후원 아래 벌어지는 이 논쟁에는 학파의 명예와 생존이 걸려 있었다.
다르마키르티는 이 무대에 반복해서 올랐다.
니야야 학파와의 논쟁에서 그가 겨냥한 것은 신 존재 증명이었다.
당시 니야야 학파의 논증은 대략 이런 구조였다.
세계는 결과다. 모든 결과에는 지적인 제작자가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지적인 제작자, 즉 신이 있다.
다르마키르티는 이 논증의 구조를 그대로 역이용했다.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하려면, 그 결과-원인 관계를 직접 경험한 사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항아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기에 항아리에 도공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 전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추론은 추론이 아니라 추측이다.
쿠마릴라 밧따와의 논쟁은 또 다른 전선이었다.
쿠마릴라는 미맘사 학파의 거인이었다.
그의 주장은 베다는 저자가 없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쓴 것은 인간의 한계를 닮지만, 아무도 쓰지 않은 것은 그 한계에서 자유롭다는 논리였다.
다르마키르티의 반론은 냉정했다.
저자 없는 텍스트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믿는 이유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진실을 알고 진실을 말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없다면 그 추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권위는 출처의 신뢰성에서 오는 것이지, 출처의 부재에서 오지 않는다.
후대의 티베트 전기, 특히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는 그가 이 논쟁들에서 논파당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물론 이것은 불교 측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논증이 이후 힌두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반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논증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굳이 반박하지 않는 주장은 위협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티베트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르마키르티가 자신의 원고를 강물에 던졌다.
동시대 인들이 그의 작업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물이 역류하며 원고가 되돌아왔다.
이것은 전설이다.
물리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전설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고, 누군가 이것을 전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의미는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작업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살아남는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은 더 쓸쓸하다.
다르마키르티의 저작은 인도 본토에서 서서히 전승이 끊겼다.
산스크리트 원전의 상당 부분이 소실됐다.
오늘날 그의 텍스트를 연구하려면 네팔에서 발견된 사본과 티베트어 번역본에 의존해야 한다.
7세기 인도에서 쓰인 논서를, 히말라야 건너편에서 건너온 번역을 통해 읽는 셈이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여러 설명이 있다.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 이후 나란다 같은 불교 대학들이 파괴된 것.
힌두 부흥 운동이 불교 지식 전통을 밀어낸 것.
어느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역사가들이 여전히 논쟁 중이다.
다만 결과는 분명하다.
강물이 원고를 돌려보냈다는 전설의 주인공은, 정작 자기 고향에서는 잊혔다.
8세기, 불교는 히말라야를 넘었다.
티베트로 전해진 불교는 단순히 종교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인도 승원의 교육 체계, 논증 방식, 텍스트 전체가 함께 왔다.
번역 작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프라마나바르띠카』도 이때 티베트어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책은 티베트에서 전혀 다른 운명을 맞았다.
겔룩, 사캬, 까규.
티베트의 주요 종파들은 종파가 달랐지만 한 가지를 공유했다.
승원 교육의 출발점으로 다르마키르티를 가르친다는 것.
13세기에 사캬 판디타가 『량리보장론』을 저술하면서 이 흐름은 더 공고해졌다.
사캬 판디타는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 체계를 티베트 학문의 기초 골격으로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르마키르티의 대답이 티베트 철학 전체의 출발 질문이 된 것이다.
오늘날 티베트 승원에서 신참 수행자가 논리학 교육을 시작할 때, 그 첫 번째 교재는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이 손뼉을 치며 논쟁을 벌이는 그 방식, 주장을 세우고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찾는 그 훈련은 7세기 남인도 승원에서 이슈바라세나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던 한 소년의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에 서구 학자들이 이 전통을 재발견했다.
러시아 학자 므체르바츠키와 오스트리아 학자 프라우발너가 산스크리트 사본과 티베트어 번역본을 대조하며 다르마키르티의 논증 구조를 재구성했다.
소실된 원전 조각들을 번역본에서 역추적하고, 흩어진 텍스트들을 연결했다.
인도에서 잊힌 것을 티베트가 보존했고, 티베트가 보존한 것을 서구 학자들이 다시 꺼냈다.
텍스트의 여정은 이렇게 기묘하다.
쓰인 곳에서는 사라지고, 건너간 곳에서 살아남고,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읽힌다.
전설은 강물이 원고를 돌려보냈다고 말한다.
실제 역사에서 원고를 돌려보낸 것은 히말라야 너머의 승원들이었다.
그리고 그 원고들은 지금도 거기 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