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상상해보자. 당신에게 토끼 한 쌍이 생겼다.
이 토끼는 태어난 지 한 달이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면 매달 새끼 한 쌍을 낳는다. 그리고 절대 죽지 않는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수학 문제니까 봐주자.)
자, 한 달 후에는 몇 쌍일까?
첫 달: 아기 토끼 1쌍. 아직 어른이 아니니 새끼를 못 낳는다.
둘째 달: 이제 어른이 됐다. 1쌍 그대로.
셋째 달: 어른 토끼가 새끼 1쌍을 낳았다. 합계 2쌍.
넷째 달: 어른 토끼가 또 새끼를 낳고, 첫 번째 새끼도 이제 어른이 됐다. 합계 3쌍.
다섯째 달: 어른 토끼 2쌍이 각각 새끼를 낳고, 지난달 태어난 새끼는 아직 아기다. 합계 5쌍.
숫자만 쭉 나열하면 이렇다.
1, 1, 2, 3, 5, 8, 13, 21, 34, 55…
규칙이 보이는가? 앞의 두 수를 더하면 다음 수가 된다. 1+1=2, 1+2=3, 2+3=5, 3+5=8. 끝없이 이어진다.
이걸 처음 글로 쓴 사람이 있다. 1202년, 이탈리아 피사에 살던 레오나르도라는 청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따라 지중해를 오가며 아랍의 수학을 배웠다.
그가 쓴 책 이름은 『산반서(Liber Abaci)』. 주판 없이 숫자만으로 계산하는 법을 유럽에 소개한 책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0, 1, 2, 3… 이 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유럽에 전파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토끼 문제는 이 책의 한 구석에 실린 연습문제에 불과했다. 레오나르도 본인도 이 수열이 800년 뒤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참, 레오나르도의 별명이 '피보나치'다. '보나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대단한 이름이 아니라 그냥 "그 보나치네 아들"인 셈이다.
카페에 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최대한 떨어져 앉는다. 첫 번째 손님은 구석 자리. 두 번째 손님은 반대쪽 구석. 세 번째는 그 사이 가장 먼 곳.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가장 효율적인 배치가 만들어진다.
식물도 비슷한 문제를 푼다. 잎이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면 어떻게 나야 할까?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윗잎이 아랫잎을 가리면 안 된다.
정답은 "이전 잎에서 약 137.5도 돌려서 나기"다.
이 137.5도가 어디서 온 숫자인지 궁금하다면 — 원 한 바퀴(360도)를 황금비(1.618…)로 나누면 약 222.5도가 나온다. 360에서 222.5를 빼면? 137.5도다. 이 각도를 '황금각'이라고 부른다.
이 각도로 잎을 배치하면 어떤 잎도 바로 위의 잎과 겹치지 않는다. 수백 장의 잎이 나더라도 마찬가지다. 가장 효율적인 햇빛 분배 전략인 것이다.
해바라기 씨앗도 이 원리로 배열된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137.5도씩 회전하며 씨앗이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그 결과 씨앗들은 나선 모양을 이루는데, 시계 방향 나선과 반시계 방향 나선의 수를 세면 거의 항상 피보나치 수다.
해바라기: 보통 34줄과 55줄.
솔방울: 8줄과 13줄.
파인애플: 8줄, 13줄, 21줄.
식물이 피보나치 수열을 '알아서' 따르는 건 아니다. 그냥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랐더니, 그 결과가 피보나치 수열과 일치하는 것이다. 수학이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효율이 수학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마치 카페 손님들이 수학을 몰라도 최적의 좌석 배치를 만들어내듯이.
피보나치 수열에는 숨겨진 마법이 하나 더 있다.
수열에서 이웃한 두 수의 비율을 계산해보자.
1÷1 = 1
2÷1 = 2
3÷2 = 1.5
5÷3 = 1.666…
8÷5 = 1.6
13÷8 = 1.625
21÷13 = 1.615…
34÷21 = 1.619…
숫자가 커질수록 이 비율은 하나의 값으로 수렴한다. 1.6180339887… 끝없이 이어지는 소수다. 이것이 바로 '황금비'다. 그리스 문자 φ(파이)로 표기한다.
황금비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직사각형 하나를 떠올려보자. 가로가 세로의 1.618배인 직사각형이 있다. 이 직사각형에서 정사각형 하나를 잘라내면, 남은 직사각형도 원래와 똑같은 비율이다. 거기서 또 정사각형을 잘라내도 같은 비율. 무한히 반복해도 같은 비율이다.
이 자기복제적 성질 때문에 황금비는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는 이론이 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정면 비율? 황금비에 가깝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 인간? 온몸에 황금비가 숨어있다. 모나리자의 얼굴 구도? 역시 황금비다.
현대로 오면 더 노골적이다. 애플 로고의 곡선, 트위터(현 X)의 새 로고, 심지어 당신이 지금 보고 있을 스마트폰 화면 비율도 황금비의 영향 아래 있다.
물론 주의할 점이 있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에 황금비가 숨어있다"는 말은 과장이다. 실제로는 황금비와 무관한 아름다운 것들이 훨씬 많다. 다만 인간의 눈이 이 비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여러 실험에서 확인됐다.
비유하자면, 모든 맛있는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소금을 적절히 넣으면 대부분의 음식이 더 맛있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황금비는 디자인의 소금 같은 존재다.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룸. 모니터에는 주가 차트가 빼곡하다. 그런데 차트 위에 수평선 몇 개가 그어져 있다. 선 옆에 적힌 숫자는 23.6%, 38.2%, 50%, 61.8%.
이 숫자들이 어디서 왔을까?
피보나치 수열에서 왔다.
8÷21 = 0.381, 즉 38.1%.
8÷13 = 0.615, 즉 61.5%.
이걸 '피보나치 되돌림'이라고 부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10층까지 올라갔다고 해보자. 그런데 건물이 흔들려서 엘리베이터가 좀 내려간다. 어디까지 내려갈까?
트레이더들은 "대략 3.8층(38.2%)이나 6.2층(61.8%)쯤에서 멈출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주가가 크게 올랐다가 조정을 받을 때, 이 비율만큼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경험칙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법칙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수많은 트레이더가 이 선을 믿고 그 가격에서 매수한다. 그러면 실제로 그 가격에서 주가가 반등한다. 모두가 "여기서 오를 것"이라고 믿고 사니까 진짜로 오르는 것이다.
이걸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부른다.
내일 비가 올 거라고 모든 사람이 믿으면, 모두 우산을 들고 나온다. 실제로 비가 오든 안 오든, 거리는 우산으로 가득 찬다. 피보나치 되돌림도 비슷하다. 숫자 자체에 마법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같은 숫자를 본다는 사실이 그 숫자에 힘을 부여한다.
수학이 시장을 예측하는 게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합의가 수학 위에 세워진 셈이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보자.
가로 85.6mm, 세로 53.98mm. 가로를 세로로 나누면? 약 1.586. 황금비(1.618)에 상당히 가깝다.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비율의 카드가 손에 가장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건 사실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건반 한 옥타브에는 13개의 키가 있다. 검은 건반 5개, 흰 건반 8개. 5, 8, 13 — 전부 피보나치 수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 전체 마디 수를 황금비로 나눈 지점에서 정확히 주제가 재등장한다. 베토벤이 의도한 건지, 음악적 직관이 자연스럽게 황금비로 이끈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컴퓨터 과학에서도 피보나치는 활약한다. 데이터를 빠르게 검색하는 '피보나치 힙'이라는 자료구조가 있고, 피보나치 수열을 이용한 난수 생성기도 있다.
심지어 킬로미터와 마일 변환에도 쓸 수 있다. 피보나치 수열에서 이웃한 수를 보면 — 5마일은 약 8킬로미터, 8마일은 약 13킬로미터, 13마일은 약 21킬로미터. 거의 정확하다. 황금비(1.618)가 마일-킬로미터 변환 계수(1.609)와 놀랍도록 비슷하기 때문이다.
800년 전 한 이탈리아 청년이 토끼를 세다가 적어놓은 숫자들. 그 숫자가 해바라기 밭을 지나, 파르테논 신전을 거쳐, 월스트리트의 모니터를 가로질러, 지금 당신의 지갑 속 카드에까지 도착했다.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피보나치 수열은 인간이 '발명'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자연에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일까?
해바라기는 피보나치를 읽은 적이 없다. 솔방울도, 앵무조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모두 같은 수열을 따른다.
어쩌면 수학은 인간이 만든 언어가 아니라, 우주가 원래 쓰고 있던 언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언어를 조금씩 해독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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