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학교에서 생물 시간에 현미경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양파 껍질을 얇게 벗겨 슬라이드 위에 올리면, 작은 칸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선생님은 말한다. "이것이 세포입니다."
그런데 이 '세포(cell)'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Cell은 원래 '작은 방'이라는 뜻이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쓰는 좁은 독방, 그것이 cell이다.
1665년, 영국의 한 과학자가 직접 만든 현미경으로 코르크 조각을 들여다봤다. 코르크를 면도칼로 아주 얇게 잘라 렌즈 아래 놓았더니, 작은 방들이 벌집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수도사의 방을 닮았다." 그래서 cell이라고 불렀다.
그 과학자의 이름은 로버트 훅(Robert Hooke)이다. 그는 이 발견을 『마이크로그래피아(Micrographia)』라는 책에 담았다. 직접 그린 삽화는 너무 정교해서, 사람들은 현미경보다 그림에 먼저 놀랐다. 벼룩 한 마리를 펼쳐 그린 그림은 접힌 종이를 펼치면 사람 팔뚝만 했다.
새뮤얼 피프스는 이 책을 "내 생애 가장 독창적인 책"이라 불렀다. 하지만 당신이 생물 시간에 세포를 배울 때, 로버트 훅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이야기의 끝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1635년, 영국 와이트 섬의 작은 마을 프레시워터. 로버트 훅은 가난한 성공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이 약했다. 자주 아팠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특별한 커리큘럼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했다.
로버트는 시계를 분해했다. 해시계의 원리를 궁금해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나무와 쇠로 장난감을 만들었다.
열세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긴 것은 동전 몇 닢뿐이었다. 로버트는 그 돈을 들고 런던으로 갔다. 화가의 도제가 되려 했지만, 물감 냄새가 두통을 일으켰다.
방향을 틀어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들어갔다. 학비는 그림 실력으로 벌었다.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한 뒤,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온다.
로버트 보일.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 보일이다. 훅은 보일의 조수가 되었다. 공기펌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이었다.
보일은 아이디어를 냈고, 훅은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냈다. 생각하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완벽한 조합이었다. 여기서 훅의 특별한 재능이 드러난다. 그는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장인이었다.
머릿속 구상을 손으로 구현할 줄 알았다. 이런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드물다.
고무줄을 잡아당겨 본 적 있는가. 살짝 당기면 쉽다. 더 당기면 더 힘이 든다. 두 배로 당기면 두 배의 힘이 필요하다.
이것이 훅의 법칙이다. 1678년에 발표했다. 수식으로 쓰면 F = kx. 힘(F)은 늘어난 길이(x)에 비례한다. k는 용수철이 얼마나 뻣뻣한지를 나타내는 숫자다.
"그게 뭐 대단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기면 세게 되돌아온다는 걸 누가 모르나. 하지만 훅이 한 일은 그 '당연한 것'에 정확한 숫자를 붙인 것이다. 과학은 "대충 그렇다"를 "정확히 이만큼이다"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 단순한 공식 덕분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의 서스펜션. 건물의 내진 설계. 스마트폰의 가속도 센서. 기계식 시계의 태엽. 전부 용수철이 얼마나 늘어나고 줄어드는지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재미있는 건 훅이 이 법칙을 처음 발표한 방식이다. 그는 라틴어 아나그램으로 발표했다. "ceiiinosssttuv." 글자를 섞어놓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를 훔칠까 봐.
2년 뒤에야 답을 공개했다. "ut tensio, sic vis" — 늘어남이 그러하듯, 힘도 그러하다. 17세기 과학자들은 아이디어 도난을 늘 걱정했다. 특허 제도가 지금처럼 정비되지 않았으니까.
훅은 특히 이 문제에 민감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결국 현실이 된다.
1666년 9월 2일 새벽, 런던 푸딩 레인의 빵집에서 불이 났다. 나흘 동안 불은 멈추지 않았다. 런던의 집 13,200채가 사라졌다. 성 바울 대성당이 무너졌다.
도시의 80퍼센트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것이 런던 대화재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화재를 크리스토퍼 렌과 연결한다. 렌이 새 성 바울 대성당을 설계했으니까.
하지만 런던 재건의 실질적 작업을 이끈 사람은 로버트 훅이었다. 훅은 런던시의 공식 측량관으로 임명되었다. 불탄 도시를 걸어 다니며 땅의 경계를 다시 그렸다. 건물 부지를 측정하고 새 도로를 계획했다.
이전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대신, 더 넓고 반듯한 거리를 설계했다. 지금 런던의 도시 구조 상당 부분은 훅의 측량에서 시작된 것이다.
측량만 한 게 아니다. 그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리니치 왕립천문대. 베들럼 왕립병원. 왕립의사회관.
런던 기념탑(The Monument)은 렌과 공동 설계했는데, 이 탑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거대한 과학 실험 도구이기도 했다. 탑의 내부는 비어 있어서, 망원경처럼 사용해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과학자가 도시를 재건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훅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경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현미경을 만들고, 용수철의 법칙을 발견하고, 건물을 설계하고, 화석을 연구하고, 날씨를 관측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했다. 오늘날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야가 너무 세분화되었으니까.
하지만 17세기는 달랐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호기심 하나가 모든 분야의 열쇠였다. 훅은 그 시대의 마지막 만능인 중 하나였다.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에는 역대 주요 회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보일의 초상화가 있다. 뉴턴의 초상화도 있다. 훅의 초상화는 없다.
훅이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을까? 아니다. 분명히 있었다.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사라졌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 시점을 뉴턴이 왕립학회 회장이 된 1703년 이후로 본다. 훅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다.
뉴턴과 훅의 갈등은 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관계 중 하나다. 시작은 빛이었다. 1672년, 뉴턴이 빛의 입자설을 발표했을 때 훅은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빛은 파동이라고. 뉴턴은 분노했다.
더 큰 충돌은 중력에서 벌어졌다. 훅은 1679년 뉴턴에게 편지를 보냈다. 행성이 태양을 도는 이유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 때문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만유인력의 핵심이다.
뉴턴은 나중에 이 아이디어를 수학적으로 완성해 『프린키피아』에 실었다. 훅은 항의했다. 자신이 먼저 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뉴턴의 대답은 유명하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겸손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훅을 향한 비꼼이라고 해석한다.
훅은 키가 작고 등이 굽은 사람이었다. "거인의 어깨"라는 표현은 "당신은 거인이 아니다"라는 뜻이었을 수 있다. 공정하게 말하면, 아이디어를 던지는 것과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
훅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라는 직관을 가졌지만, 수학적 증명은 하지 못했다. 뉴턴은 그것을 해냈다. 하지만 아이디어의 씨앗을 뿌린 사람에게 공을 돌리지 않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훅은 17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해 뉴턴이 왕립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 뒤 왕립학회가 새 건물로 이전할 때, 훅의 초상화가 사라졌다. 훅이 만든 실험 기구들도 함께.
우연이었을까, 의도였을까.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정황은 무겁다. 뉴턴은 과학의 신이 되었다. 훅은 교과서에서 한두 줄짜리 각주가 되었다. 세포를 발견하고, 용수철의 법칙을 세우고, 런던을 재건한 사람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로버트 훅의 이야기는 과학에서도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천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정치적 힘이, 때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당신이 생물 시간에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볼 때,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을 기억하는가. 이제는 기억해도 좋겠다. 로버트 훅. 뉴턴이 지우려 했지만, 세포라는 단어가 남아 있는 한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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