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편의점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삼각김밥을 하나 집어 든다. 참치마요, 불고기, 김치볶음밥. 세 종류 중에서 두 개를 고르려면 몇 가지 조합이 가능할까?
참치+불고기, 참치+김치, 불고기+김치. 세 가지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계산. 사실 여기에 수백 년간 수학자들을 사로잡은 거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
"3개 중에서 2개를 고르는 경우의 수는 3이다."
이 문장을 수학 기호로 쓰면 ₃C₂ = 3이 된다. 고등학교 때 배운 '조합'이다. 그리고 이 조합의 숫자들을 삼각형 모양으로 예쁘게 배열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파스칼의 삼각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파스칼은 17세기 프랑스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삼각형을 300년 먼저 그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은 주세걸(朱世傑). 13세기 중국 원나라의 떠돌이 수학 선생님이었다.
파스칼의 삼각형을 처음 보면 좀 당황스럽다. 삼각형인데 숫자가 적혀 있다. 하지만 규칙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레고 블록을 쌓는다고 상상해 보자.
맨 꼭대기에 블록 하나를 놓는다. 거기에 '1'이라고 쓴다. 그 아래 줄에는 블록 두 개를 놓고, 둘 다 '1'이라고 쓴다.
여기서부터가 재밌다. 세 번째 줄부터는 위에 있는 두 블록의 숫자를 더해서 아래 블록에 쓴다.
1
1 1
1 2 1
1 3 3 1
1 4 6 4 1
1 5 10 10 5 1
이게 전부다. 위 두 숫자를 더하면 아래 숫자가 된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덧셈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삼각형 안에 놀라운 것들이 숨어 있다.
네 번째 줄 1 3 3 1을 보자. 아까 삼각김밥 문제 기억나는가? 3개 중 0개를 고르는 경우(1가지), 1개를 고르는 경우(3가지), 2개를 고르는 경우(3가지), 3개를 고르는 경우(1가지). 정확히 1 3 3 1이다.
로또 번호 조합도, 주사위 확률도, 심지어 DNA 유전 패턴까지. 이 삼각형 하나로 계산할 수 있다.
수학자들이 열광할 만하다.
자, 이제 시간을 700년 전으로 돌려보자.
1303년. 한국에서는 고려 충렬왕 시대다. 유럽에서는 아직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이다. 블레즈 파스칼이 태어나려면 앞으로 32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 시기, 중국 원나라에 주세걸이라는 수학자가 있었다.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건 많지 않다. 확실한 건 그가 떠돌이 수학 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20년 넘게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학을 가르쳤다.
대학 교수도, 왕실 학자도 아니었다. 그냥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수학의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1299년, 그는 첫 번째 책 《산학계몽(算學啟蒙)》을 썼다. 제목을 풀면 '수학의 문을 여는 책'이다. 초보자를 위한 수학 입문서였다. 곱셈부터 시작해서 연립방정식까지, 단계별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파인만 테크닉의 원조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4년 뒤인 1303년, 그의 걸작이 나온다. 《사원옥감(四元玉鑑)》. '네 개의 미지수를 다루는 옥같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한 장의 그림. '고법칠승방도(古法七乘方圖)'. 우리말로 하면 '옛 방법에 따른 7승 전개도'다.
이것이 바로 파스칼의 삼각형과 똑같은 삼각형이다.
주세걸은 이 삼각형을 '옛 방법'이라고 불렀다. 즉, 자기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자기보다 더 이전부터 중국에서 알려져 있던 방법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중국 수학자 가헌(賈憲)은 이보다 250년 전인 1050년경에 이미 이 삼각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스칼이 1654년에 연구한 이 삼각형은, 중국에서는 이미 600년 전부터 '옛날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세걸의 진짜 대단한 업적은 삼각형이 아니다. 그의 이름을 수학 역사에 영원히 새긴 것은 바로 사원술(四元術)이다.
쉽게 설명해 보겠다.
중학교 수학에서 이런 문제를 풀어본 적 있을 것이다.
"사과 2개와 배 3개의 가격이 5,000원이다. 사과 1개와 배 2개의 가격은 3,000원이다. 사과와 배의 가격은 각각 얼마인가?"
모르는 값(미지수)이 2개다. 사과 가격과 배 가격. 식도 2개. 이걸 연립방정식이라 하고, 중학생도 풀 수 있다.
자, 이제 난이도를 올려보자.
"사과, 배, 귤, 포도의 가격을 모른다. 네 가지 과일이 복잡하게 엮인 조건이 여러 개 주어진다. 게다가 가격끼리 곱하거나 제곱하는 조건도 있다."
미지수가 4개이고, 그것들이 서로 곱해지기도 하는 복잡한 방정식. 이걸 푸는 방법이 사원술이다.
주세걸은 '천(天)', '지(地)', '인(人)', '물(物)'이라는 이름으로 4개의 미지수를 표현했다. 하늘, 땅, 사람, 사물. 동양 철학의 세계관이 수학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이 4개의 미지수가 포함된 다항식 방정식을 체계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유럽에서 비슷한 수준의 다원 연립방정식 풀이법이 등장한 것은 19세기다. 에티엔 베주(Étienne Bézout)가 소거법을 발전시킨 것이 1779년이다.
주세걸이 1303년에 해낸 일을, 유럽은 거의 500년 뒤에야 따라잡은 셈이다.
주세걸은 또한 '초차소장술(招差召莊術)'이라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건 오늘날 '유한차분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복잡한 수열의 합을 구하는 기법이다.
아이작 뉴턴이 같은 방법을 독립적으로 발견한 것이 약 400년 뒤다.
떠돌이 수학 선생님이 뉴턴과 파스칼을 수백 년 앞서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해보자.
주세걸이 이렇게 대단한 수학자라면, 왜 교과서에는 '파스칼의 삼각형'이라고 쓰여 있을까? 왜 '주세걸의 삼각형'이 아닐까?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책이 사라졌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세걸의 책은 중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원옥감》은 중국 본토에서 수백 년간 잊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살아남은 곳은 한국과 일본이다. 조선에서 이 책을 수입해 연구했고, 일본에서도 18세기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둘째, 수학사가 유럽 중심으로 쓰여졌다. 근대 과학사는 주로 유럽 학자들이 정리했다. 자연스럽게 유럽인의 업적이 기준점이 되었다. 파스칼이 연구하기 수백 년 전에 같은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셋째, 이름의 힘이다. 파스칼은 서양에서 철학자이자 물리학자로도 유명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한 사람이다. 기압의 단위 '파스칼(Pa)'에도 이름이 남아 있다.
이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은 더 쉽게 퍼진다. 반면 주세걸은 떠돌이 선생님이었다. 관직도 없었고, 제자 명단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오늘날 수학사 학자들은 이 삼각형을 '파스칼의 삼각형'이 아니라 '양휘-주세걸-파스칼 삼각형' 또는 단순히 '산술 삼각형'이라 부르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양휘삼각형(楊輝三角)'이라 부른다.
양휘는 주세걸보다 조금 앞선 남송의 수학자로, 1261년에 이 삼각형을 기록으로 남겼다.
수학의 아름다운 점이 여기 있다. 좋은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중국의 가헌, 양휘, 주세걸. 페르시아의 오마르 하이얌. 인도의 핑갈라. 프랑스의 파스칼.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대와 대륙에서, 같은 삼각형을 발견했다.
주세걸은 700년 전 흙먼지 나는 길 위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인류의 지식에 거대한 벽돌 하나를 놓았다.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지만, 숫자는 잊히지 않았다.
그가 쌓아 올린 삼각형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확률 계산에, 컴퓨터 알고리즘에, 당신의 스마트폰 속 암호화 기술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고를 때, 그 조합의 수를 세는 보이지 않는 삼각형 속에 700년 전 떠돌이 선생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걸 알고 나면, 삼각김밥이 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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