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정조가 새 도시를 짓겠다고 했을 때, 그 핵심 기계를 그린 사람은 정약용이라는 28세 청년이었어요.
1792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그 곁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어요.
성곽을 쌓으려면 수십 톤짜리 화강암을 높은 곳으로 올려야 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그걸 할 기계가 없었어요.
그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정약용이었어요.
그가 설계한 거중기는 도르래 여러 개를 조합해 사람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기계예요.
오늘날 공사 현장 크레인의 원리와 같아요.
정조는 이 거중기 덕분에 공사비 4만 냥이 절약됐다고 직접 기록했어요.
갓 서른도 안 된 신하가 국가급 신도시 공사의 핵심 기계를 설계하고, 그 결과가 왕의 글에 남은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박사학위를 막 딴 30세 청년이 정부 신도시의 핵심 인프라를 통째로 설계한 격이에요.
그런데 이 천재 청년의 삶은, 9년 뒤 완전히 뒤집혔어요.

1801년 봄, 정약용은 천주교를 버린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살아남았어요.
같은 자리에서 그의 형 정약종은 거부하고 처형됐어요.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반대 파벌인 노론 벽파가 권력을 쥐었어요.
그들은 오래전부터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와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기회를 잡자 대대적인 처형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예요.
신유박해란 신유년(1801년)에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한 사건이에요.
정약용의 집안은 핵심 표적이었어요.
정약용 3형제는 같은 책상에서 같은 책을 읽으며 자랐어요.
마치 같은 독서 모임에 다닌 사이처럼요.
하지만 단속이 들이닥치자 선택이 갈렸어요.
셋째 형 정약종은 배교를 끝까지 거부했어요.
그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어요.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배교 진술서에 서명했어요.
죽음은 면했지만, 평생 죄인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했어요.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어요.
그 두 사람은 섬과 육지로 각자 보내진 뒤,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어요.

정약용의 대표작은 한양 궁궐이 아니라 전남 강진의 초가집에서 나왔어요.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 동안, 정약용은 강진에서 죄인으로 살았어요.
처음엔 주막 한 귀퉁이에서 지내다가, 나중엔 만덕산 기슭의 작은 초가로 옮겼어요.
그 초가 뒷산에 차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정약용은 그 산 이름을 따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그를 "다산 정약용"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유배지에 있어요.
그 초가, 다산초당에서 나온 책이 500여 권이에요.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지켜야 할 원칙을 정리한 책이에요.
공직자 청렴 매뉴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내용이 너무 날카로워서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읽혀요.
〈흠흠신서〉는 억울한 사람이 잘못된 재판으로 죽는 걸 막기 위한 형사 재판 원칙서예요.
〈경세유표〉는 조선의 행정 시스템 전체를 뜯어고치는 개혁안이에요.
죄인 신분으로 초가에서 쓴 책이 국가 개혁 설계도였어요.
정조의 총애를 받던 한양 시절보다, 죄인으로 유배된 18년 동안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어요.
강진에서 그에게 남은 건 붓과 먹과 시간뿐이었거든요.

유배가 풀렸을 때 정약용은 57세였어요.
그는 다시 관복을 입지 않고, 죽을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어요.
1818년, 18년 만에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로 돌아왔어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예요.
죄인 신분은 벗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자리는 없었어요.
그를 아끼던 정조는 이미 18년 전에 죽었어요.
그를 불러줄 사람이 없었어요.
정약용은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어요.
대신 강진에서 다 끝내지 못한 원고를 계속 다듬었어요.
자식과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또 18년이 흘렀어요.
유배 18년, 침묵 18년. 합쳐서 36년을 책상 앞에서 보낸 거예요.
결국 〈목민심서〉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어요.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1836년 이후에야 세상에 널리 퍼졌어요.
거중기를 설계한 28세 청년이 만약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연 〈목민심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