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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이 글은 "명제(proposition)"라는 골치 아픈 철학 개념을 최대한 쉬운 말로 다시 풀어본 것이다. 어려운 용어는 나올 때마다 옆집 아저씨한테 설명하듯 바꿔 말할 것이다.
친구가 한국어로 "비가 온다"고 말한다. 미국 친구는 "It is raining"이라고 말한다.
문장은 다르다. 글자도, 소리도, 언어도 다르다. 그런데 뭔가 똑같은 게 있다. 두 사람은 지금 밖에서 벌어지는 같은 일을 말하고 있다.
그 "똑같은 뭔가"에 이름을 붙인 게 바로 명제다.
즉, 명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이 전달하려는 내용이다. 봉투(문장) 말고, 봉투 안에 든 편지(명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장은 어떤 언어에서 한 낱말, 또는 낱말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문법에 맞다", "의미가 있다" 같은 조건은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같은 문장이 맥락에 따라 다른 뜻을 가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I gave a hand"는 진짜 손을 줬다는 뜻일 수도, 도와줬다는 뜻일 수도 있다.
철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건 서술문이다. 서술문은 어떤 주장을 하는 데 쓰이는 문장, 즉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다.
그냥 "문장" 하나로 퉁치면 안 되나? 안 된다. 이유가 몇 개 있다.
첫째, 어떤 문장은 아무 의미도 없거나,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둘째, 같은 문장인데 참/거짓이 달라진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 — 내가 말하면 참일 수 있고, 멀쩡한 당신이 말하면 거짓이다. 문장은 똑같은데 진위가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니 진짜 참·거짓을 담는 놈은 문장 자체가 아니라, 그 문장이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셋째, 다른 언어의 다른 문장들이 같은 걸 말한다. "비가 온다"와 "It is raining"처럼. 이 공통분모를 규정해줄 방도가 필요하다. 그 공통분모가 바로 명제다.
명제는 이런 특징을 가졌다고들 한다. 이게 좀 유령 같다.
정리하면: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고, 볼 수도 없는데, 참과 거짓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 게 진짜 있긴 해?"
여기가 링이다. 한쪽엔 "있다(실재론)", 다른 쪽엔 "그런 거 없다, 편의상 하는 말일 뿐(유명론)"이 붙는다. (이 배경 논쟁 자체는 다들 아니까 넘어간다.)
핵심 규칙 하나: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 증명 책임을 진다.
명제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라일에 따르면 두 갈래 길을 검토해볼 수 있다.
하나씩 보자.
말은 거창한데, 뜻은 단순하다.
"의식의 모든 행위는 무언가를 '향해' 있다."
그냥 둥둥 뜬 믿음 같은 건 없다. 믿으면 무언가를 믿고, 바라면 무언가를 바란다. 이때 그 향하는 대상을 그 행위의 "대격" 또는 "의도"라고 부른다.
이건 명제 태도와도 이어진다. "나는 P라고 믿는다(I believe that P)" 같은 것. 내가 무언가를 믿거나 바랄 때, 내가 믿거나 바라는 그것이 하나의 명제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명제들은 그것을 향하는 의식 행위와는 독립적이라고 본다.
여기서 명제가 있다고 미는 근거들:
믿음은 사람마다 다른데, 믿는 '대상'은 같다. A와 B가 둘 다 "리먼브라더스가 2008년에 파산했다"를 믿는다. 두 사람 머릿속 믿음 자체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둘이 믿는 그것은 똑같다. 그 똑같은 것 = 명제.
시간이 지나도 명제 자체는 안 변한다. 나는 예전엔 "비트코인이 3만 달러를 넘는다"를 안 믿었지만 지금은 믿는다. 바뀐 건 내 태도지, 그 명제의 성격이 아니다. 자연 법칙도 마찬가지. "빛의 속도로 가면 거리가 수축한다"는 1700년대 갈릴레이는 안 믿었겠지만, 그렇다고 그 명제 자체가 그때는 달랐던 건 아니다.
명제는 '심상'도 '사실'도 아니다. 2005년에는 리먼 사태가 아직 안 일어났다. 그러니 그때 "2008년에 리먼이 파산한다"는 아직 사실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도 그 내용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명제는 실제 사실과도, 내 머릿속 그림과도 다른 제3의 무엇이다.
믿는다고 그 대상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believe·hope" 같은 명제적 동사도, "see·touch" 같은 인식적 동사처럼 대격(향하는 대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인식적 동사는 그 대상이 진짜 있어야 성립하지만, 명제적 동사는 그렇지 않다.
둘은 달라 보인다. 교훈: 문법적 가치가 존재론적 가치를 보증하지 못한다. ("~에 대해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대상이 세상에 실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 명제는? 지향성 논제는 "의식이 향하는 대상"에서 출발하는데, 아무도 안 향한 명제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두 번째 전략: 지시적 의미 이론.
이 그림은 장점이 있다. 왜 서로 다른 문장이 "같은 뜻"인지(동의성)를 깔끔하게 설명한다.
프레게는 이걸 세 층으로 나눴다.
프레게의 유명한 예: 샛별과 개밥바라기.
둘 다 사실은 금성이다. 그러니 가리키는 대상(지시체)은 같다. 그런데 "새벽에 뜨는 별", "저녁에 뜨는 별" — 뜻은 다르다.
여기서 용어 정리:
그리고 규칙 하나:
프레게는 이렇게 봤다.
왜 이런 이상한 소리를? 문장을 복합 이름으로 취급하면, 이름처럼 \\바꿔치기(대치)\\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법칙 (이걸 처음 밝힌 게 라이프니츠라고 한다): 명사 A와 B가 같은 지시체를 가진다면, 문장 속 B를 A로 바꿔 넣어도 그 문장의 지시체(진위)는 안 변한다.
단, 이건 외연적 맥락에서만 성립한다. 원자 문장을 다른 문장 속에 대치해도 성립하고, 내포는 다르지만 외연이 같은 원자 문장들에서도 성립한다.
문제는 that 앞에 명제적 동사가 오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은 내포적이다. 이때 that절 뒤 문장이 가리키는 지시체는 뜻이 아니라 명제다. 여기서 함정이 터진다.
바꿔치기 규칙이 갑자기 안 통하는 순간이 있다.
예: 키케로 = 툴리 (같은 사람의 두 이름). 참고로 "'키케로'는 세 철자를 포함한다" 같은 문장에서는 이 둘을 바꿔치기하면 안 된다. 지시체는 같아도 내포적 맥락이라 진리값이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인데?! 필립이 "키케로 = 툴리"인 줄 몰랐다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렇게 이름을 같은 대상으로 바꿔치기했는데 진위가 흔들리는 맥락을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한다.
콰인의 입장에서, 양화(∃x, ∀x)로 묶인 변항의 값이 내포적 대상이 아닌 한,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문맥을 양화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내포적 대상을 인정하면, 그 대상을 하나하나 \\개별화(individuation)\\해야 하는데, 이게 콰인이 철저히 거부하는 분석성 개념에 의존한다. 그래서 콰인은 이 모델을 못마땅해했다.
풀어서 보자. 콰인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그 대상이 양화문의 변수값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x가 어떤 것들을 값으로 가질 수 있느냐가 존재론적 약속을 정한다.
철수는 페가수스가 날개 달린 말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어떤 x에 대해, 철수는 x가 날개 달린 말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x의 값이 보통의 외연적 대상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페가수스는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투명 문맥을 양화하려면 "철수가 믿는 어떤 내포적 대상/의미/개념이 있다"고 해야 한다.
콰인이 이걸 싫어하는 이유는, 내포적 대상을 인정하는 순간 이런 질문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내포적 대상을 개별화하려면 결국 이렇게 말해야 한다: 두 표현이 분석적으로 동치이면 같은 내포, 아니면 다른 내포. 즉 내포의 동일성 기준이 분석성에 의존한다. 그런데 콰인은 그 분석성 자체를 못 믿는다. 그러니 그에겐 사상누각이다.
길 B의 뿌리를 흔드는 질문. "애초에 '의미'가 뭐냐?" 지시적 의미 이론에서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 1: '가리킨다(지시)'는 것부터 불분명하다.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뭘 가리킨 건가? 책상? 책상의 색깔? 나뭇결? 책상의 '이데아'? 지시 관계는 생각보다 흐릿하다.
문제 2: 설명이 뱅뱅 돈다(순환). 명제를 "문장의 내용"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문장이 명제를 "표현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정보적 역할을 하는지 불분명하다. 기껏해야 "명제란 여러 문장 사례에 공통으로 붙어 있는 어떤 것" 정도다.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가 그 문장의 의미다"라는 말은 결국 제자리를 도는 순환이다. 그러니 의미 개념 자체에 대한 해명이 먼저 필요하다.
대안은 없나? 의미를 꼭 지시 관계로만 다룰 필요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규약적 방법처럼 의미를 다루는 다른 길이 있다면, 명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지시로서의 의미"를 끌고 올 필요는 없다. 예컨대 명제를 지시가 아니라 문장의 동의성에 기대어 볼 수도 있다. 이때 명제는 "동의성을 가진 문장들의 집합"이 된다. (물론 집합도 추상적 개념이긴 하다.)
문제 3: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 콰인은 아예 의미 개념을 거부한다. 어떤 표현에도 "이것이 그 표현의 하나의 의미다"라고 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의미는 불확정적이다.
이건 두 원리를 합친 결과다.
이제 유명한 예시. 전혀 모르는 언어를 처음 번역한다고 하자. 원주민이 토끼를 가리키며 "가바가이(gavagai)!" 라고 외친다.
"토끼"라고 번역하면 될까? 그런데 왜 꼭 "토끼"인가?
이 중 어느 걸로 번역해도, 나머지 언어 체계 전체를 적절히 조정하면 관찰되는 행동 자료와 다 아귀가 맞는다. 행동 자료는 전체 번역 도식에 제약은 걸지만, 유일한 정답 번역을 강제하지는 못한다.
의미가 이렇게 불확정적이라면, "명제 = 문장의 의미"라는 정의도, "두 문장이 같은 명제를 표현한다(=동의성)"는 말도 다 흔들린다.
콰인은 명제가 추상적 대상이라는 점도 싫어했다. 동일성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일성 기준: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가려내고, 그것이 같은 것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No entity without identity.
문장 x와 y가 동의성을 가져 같은 명제 p를 표현한다고 말하려면, 먼저 "동의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콰인에게 동의성은 의미 개념에 기대는 불명료하고 공허한 개념이다. 따라서 명제 p를 독립적 대상으로 세울 근거가 없다. 기껏해야 "명제"라는 말은 문장들에 대해 말하는 편의적 표현으로 환원될 뿐이고, 그 환원조차 안 되면 명제는 유명론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빠져나갈 구멍으로, 명제를 거창한 추상 대상이 아니라 그냥 "진술(statement)" 정도로, 즉 문장에 대해 편하게 말하는 방식(façon de parler, 말버릇)으로 취급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문장 자체는 진리 담지자가 아니니까.
그러면 딜레마는 이렇게 정리된다.
갈림길 1 — 명제를 독립적 추상 대상으로 이해한다.
갈림길 2 — 명제를 '진술'에 가까운 말버릇으로 이해한다.
명제는 "문장이 말하려는 알맹이"다. 서로 다른 문장이 같은 걸 말할 수 있고, 참·거짓을 담는 진짜 주인은 문장이 아니라 이 알맹이 같아서, 사람들은 명제라는 걸 상정한다. 하지만 이놈은 눈에 안 보이고 시공간에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라 "정말 있냐"는 반박에 시달린다.
지향성으로 밀면 "믿는다고 대상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에 걸리고, 의미로 밀면 프레게의 정교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콰인의 불투명성·번역 불확정성·동일성 기준 앞에서 무너진다.
결국 명제를 진짜 있는 것으로 밀면 이론은 강해지지만 "그게 뭔지, 언제 같은 건지 말해봐"에 무너지고, 그냥 말버릇으로 취급하면 안전하지만 시시해진다.
명제는 있다고 하기도 없다고 하기도 애매한, 철학의 대표적 골칫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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