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쓰지 데쓰로의 윤리학이 전쟁을 옹호한 이유, 풍토와 간병의 철학

와쓰지는 니체를 사랑한 뒤 일본 사찰에 빠졌다
와쓰지 데쓰로의 책상에 처음 놓인 책은 일본 고전이 아니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어요.
그가 일본 윤리학의 정초자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1913년, 도쿄제국대학 학생이던 와쓰지는 첫 책 『니체 연구』를 냈어요.
"신은 죽었다"고 외친 독일 철학자를 숭배하던, 가장 서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청년이었죠.
그런데 딱 6년 뒤, 그는 완전히 다른 책을 들고 나타나요.
1919년에 펴낸 『고사순례(古寺巡礼)』는 나라의 천 년 된 절들을 발로 돌아다닌 여행기예요.
호류지, 도다이지 같은 오래된 사찰에서 불상의 미소 앞에 멍하니 서 있던 기록이죠.
"신은 죽었다"를 외치던 청년이 천 년 된 부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거예요.
영미 록 음악만 듣던 사람이 어느 날 산사에서 종소리를 듣고 멍해지는 것처럼, 와쓰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서구 개인주의 철학에서 출발해 동양 미학으로 돌아선 그 전환이 이후 모든 것의 씨앗이 됐어요.

와쓰지는 하이데거를 읽고 풍토를 구상했다
와쓰지가 일본 윤리학을 시작한 곳은 교토가 아니라 베를린의 한 셋방이었어요.
1927년, 독일 유학 중에 와쓰지는 막 출간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었어요.
『존재와 시간』은 인간을 시간 속의 존재로 분석한 20세기의 대표 철학서예요.
와쓰지는 읽으면서 흥분했지만, 곧 뭔가 빠져 있다는 걸 느꼈어요.
"시간만 다루고 공간을 빼먹었잖아."
그는 귀국길에 인도양과 동남아 몬순 지대를 직접 통과하며 기후를 몸으로 체험했어요.
사막을 지나고 열대우림을 통과하면서 메모를 쌓아갔죠.
그 결과가 1935년에 나온 『풍토(風土)』예요.
인류를 몬순, 사막, 목장이라는 세 가지 기후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 환경이 그 안의 인간을 어떻게 빚어냈는지를 분석한 책이에요.
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우리 동네 골목이 새로 보이는 순간처럼, 비교를 통해서만 자기를 알게 되는 경험이죠.
가장 일본적인 철학이 독일 책 한 권에 대한 반박으로 잉태됐다는 게 묘해요.
하이데거가 빠뜨린 공간을 채우려다, 와쓰지는 자기 자신의 토대를 발견했어요.

와쓰지는 '혼자는 인간이 아니다'라 단정했다
와쓰지에게 "나"는 거짓말이었어요.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이 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에요.
193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49년에 완성한 대표작 『윤리학』(전 3권)에서 와쓰지는 이 생각을 체계화했어요.
그 출발점이 놀라워요. "인간(人間)"이라는 한자 자체를 뜯어봤거든요.
人間.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직역하면 "사람 사이"예요.
여기서 그는 힌트를 얻었어요. 인간이란 개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망 자체라는 것이죠.
그 관계망을 그는 간병(間柄, 아이다가라)이라고 불렀어요.
아이다가라란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살아있는 얽힘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단톡방에서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기분을 아는 그 관계의 결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홀로 떨어진 개인은 와쓰지에게 인간이 아니에요.
영화에서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사람이 결국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혼자"라는 말조차 누군가가 있어야만 성립하니까요.
니체의 "초인"을 사랑했던 청년이 정반대로 "독립된 나는 거짓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와쓰지의 윤리학은 결국 국가에 흡수됐다
사람 사이의 따뜻함에서 시작한 윤리학은, 끝내 국가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와쓰지의 윤리학은 동심원 구조예요.
가장 작은 원은 가족, 그 바깥이 지역 공동체, 그 다음이 사회, 그리고 가장 바깥이 국가예요.
국가가 윤리의 최종 정점이라는 게 그의 논리였어요.
문제는 이 구조가 1940년대 일본 군국주의와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는 거예요.
1942년 전후, 와쓰지는 미국의 국민성을 분석하며 일본 정신을 옹호하는 글을 썼어요.
그의 '간병' 이론은 국체(国体) 사상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됐어요. 국체란 천황을 나라의 절대적 중심으로 놓고, 모든 개인이 그 아래 귀속돼야 한다는 일본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예요.
좋은 의도로 만든 SNS 알고리즘이 결국 사회 분열의 도구가 되는 것처럼, 출발의 선의가 종착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해요.
와쓰지가 그 위험을 몰랐던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눈을 감았던 걸까요.
패전 후 와쓰지는 일부 수정을 가했지만, 국가를 윤리의 정점으로 놓는 골격은 거의 그대로 뒀어요.
그리고 1960년,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났어요.
"사람 사이"에서 출발한 철학이 "국가를 위한 사람"으로 끝난 여정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