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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메이지 정부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내민 자리는, 그 시대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자리였다.
문부성 고위직, 외무성 요직, 새로 세워지는 근대 국가 기관의 핵심 자리.
서양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일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권력이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 임원 자리를 여러 번 거절하고 자기 출판사를 계속 운영한 베스트셀러 작가와 같다.
이상한 선택처럼 보인다.
그런데 후쿠자와의 논리는 단순했다.
권력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 권력의 도구가 된다고, 그는 믿었다.
정부를 바꾸려면 정부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평생 재야에 남았다.

후쿠자와가 평생 가장 미워한 것은, 자기를 키워준 그 사무라이 제도 그 자체였다.
1835년, 그는 오사카에서 나카쓰 번의 하급 사무라이 아들로 태어났다.
사무라이 신분은 오늘날로 치면 '세습 공무원 가문'쯤 된다.
태어날 때 이미 계급이 정해지고,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 선 위로는 올라갈 수 없는 구조였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그 함정에 빠진 사람이었다.
공부를 좋아하고 능력도 있었지만, 하급이라는 신분 때문에 평생 승진하지 못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떴고, 어린 후쿠자와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문벌제도는 부모의 원수다."
이 한 줄이 그의 평생 싸움을 요약한다.

후쿠자와가 관직 대신 고른 무기는 단 두 가지, 학교 하나와 책 한 권이었다.
1858년, 그는 에도(지금의 도쿄)에 작은 난학숙을 열었다.
난학이란 네덜란드어를 통해 서양 학문을 배우는 학문으로, 당시 일본에서 서양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창문이었다.
이 작은 학원이 훗날 게이오 의숙, 지금의 게이오 대학이 된다.
그리고 1872년, 책 한 권이 나왔다.
제목은 『학문의 권유』.
첫 문장은 이랬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이 문장이 당시 얼마나 퍼졌는지는 숫자가 말해준다.
17편으로 나뉘어 출간된 이 책의 누적 판매량은 300만 부를 넘었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가 약 3500만 명이었으니, 열 명 중 한 명이 읽은 셈이다.
위에서 법령으로 바꾸는 개혁과, 아래에서 사람을 바꾸는 교육.
후쿠자와는 두 번째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후쿠자와가 1885년 봄 발표한 짧은 사설 한 편이 이후 60년 동아시아의 비극을 예언했다.
사설의 이름은 「탈아론」.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이 근대화에 뒤처진 조선과 청을 기다려줄 필요 없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조선과 청을 "악우(惡友)", 나쁜 친구라고 불렀다.
나쁜 친구 곁에 있으면 같이 나쁜 놈 취급을 받는다는 논리였다.
교실에서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가르친 선생이 "그런데 옆 동네 애들은 빼고"라고 덧붙이는 꼴이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후쿠자와에게 평등은 신분을 부수는 도구였지, 국경을 넘는 보편적 원칙이 아니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그 사설이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 논리에 얼마나 자주 소환됐는지를 알면, 해석은 거기서 멈추기 어렵다.
후쿠자와라는 인물이 여전히 불편한 건, 그가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방자이면서 배제자였던 그 모순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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