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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임성주를 키운 것은 그가 결국 부순 바로 그 학파였다.
18세기 조선, 그는 노론의 정통 학맥 한가운데서 자랐다.
노론은 당시 조선의 정치와 학문을 동시에 장악한 당파였다.
그 중심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현종 시대를 주름잡은 대학자로, 그의 학통은 조선 유학의 공식 언어나 마찬가지였다.
임성주는 그 송시열의 학통을 직접 이은 한원진 문하에서 수학했다.
한원진은 18세기 최대 철학 논쟁인 호락논쟁에서 호론 측을 대표한 학자였다.
호락논쟁이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학문 대결이었다.
학파 전체가 임성주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가 택한 길은 달랐다.
명문 집안의 후계자가 가풍을 잇기는커녕 가풍 자체를 뒤엎는 상황, 딱 그것이었다.
임성주가 한 일은 이(理)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를 기 안으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조선 학계 전체가 뒤집힐 수 있는 일이었다.
주자학, 그러니까 조선의 공식 철학은 세상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봤다.
하나는 이(理), 물질 너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 원리다.
다른 하나는 기(氣), 실제로 움직이고 형체를 만드는 에너지이자 물질이다.
주자학 정통의 답은 간단했다. "이가 기 위에 있고, 기는 이를 따른다."
영혼이 몸을 지배한다는 관점과 비슷하다.
임성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물었다.
"이가 기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그가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이는 기 안에 있는 원리일 뿐이다."
이것이 기일원론(氣一元論)이다.
세상의 근본은 기 하나뿐이고, 이는 그 기 자체의 원리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비유로 치면 이렇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드웨어 위에서 실행되는 것이 소프트웨어다.
이것이 왜 위험했냐면, 노론이 절대시한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이 바로 '이가 기 위에 있다'는 명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임성주는 학파를 떠나지 않은 채 학파의 뼈대를 흔들었다.

임성주는 학파를 떠나지 않은 채, 평생 학파를 안에서 무너뜨릴 글을 적고 있었다.
그것도 30년 넘게, 산속에서.
그는 평생 벼슬을 거의 사양했다.
조선에서 학자가 벼슬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을 안 다니는 게 아니었다.
벼슬은 학문적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경로였다.
그 경로를 스스로 닫고, 임성주는 공주와 충청 일대 산촌에 은거했다.
그리고 거기서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녹려잡지(鹿廬雜識)다.
녹려잡지는 '녹문 산방의 잡록'이라는 뜻이다.
그의 호 녹문(鹿門)을 딴 이름이고, 기일원론을 포함한 그의 핵심 사상이 집약된 저작이다.
이 책은 만년에야 완성되었고, 사실상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학계에 제대로 알려졌다.
회사를 떠나지 않은 채 30년간 회사의 잘못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두다가, 죽기 직전에야 책상 위에 올려둔 사람을 생각해보면 된다.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가장 큰 반박이 자라고 있었다.

임성주가 정통이 아니라고 외면당한 그 학설은, 한 세대 뒤 조선 사상의 새 입구가 되었다.
역사에서 이런 일은 놀랍도록 자주 반복된다.
기일원론의 핵심 명제는 단순했다. "세상 모든 것은 같은 기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 교과서 한 줄로 읽으면 무해한 문장이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 명제는 달랐다.
당시 신분제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理)를 부여받았다'는 형이상학으로 뒷받침되었다.
임금과 노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논리였다.
"모두 같은 기다"는 주장은 그 논리를 정면으로 흔들었다.
19세기 최한기는 임성주의 기일원론 위에서 기학(氣學)이라는 독자적 사상 체계를 세웠다.
최한기는 경험과 관찰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 19세기 조선의 대표적 사상가였다.
기학은 서양 근대 과학과 맞닿는 언어를 찾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사상적 도구가 되었다.
인간 평등을 향해 걸어간 후기 실학과 동학의 사상적 토양도 이 흐름과 연결되어 재해석되었다.
살아생전엔 이단의 글이었던 것이 한 세대 뒤에 시대를 뒤집는 씨앗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들 중에, 아직 녹려잡지처럼 어딘가 산속 책상 위에 잠든 것이 얼마나 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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