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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34년 새벽, 27세 사무라이 한 명이 칼을 내려놓고 번을 빠져나갔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일이었다.
그가 한 것은 탈번(脱藩)이었다.
번이란 지금으로 치면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무사 집단, 오늘날의 기업 조직 같은 것이고, 탈번은 허가 없이 그 조직을 이탈하는 행위였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 이건 반역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홀어머니 봉양.
고향 오미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는 기다릴 수 없었다.
반전은 이 사람이 버려야 할 게 꽤 많았다는 점이에요.
나카에 도주(中江藤樹)는 이요 오즈번에서 인정받는 유망한 무사였고, 잘 버티면 출세 가도가 열려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안정된 대기업 팀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골로 내려가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곁이 먼저라고 판단했어요.
그 결단 하나가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결정했다.
에도의 학자 자리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택한 강의실은 다카시마 마을의 흙바닥 글방이었다.
고향 오미 다카시마로 돌아온 나카에 도주는 생계를 위해 술집 일을 했어요.
하지만 틈날 때마다 마을 농부들과 아이들을 불러 앉혀 글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핵심은 효(孝)였다.
효라는 건 단순히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가 아니었어요.
그에게 효는 모든 인간 관계의 뿌리에 있는 윤리,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가족을 넘어 마을 전체로 번져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근강성인(近江聖人)이라 불렀어요.
근강(近江)은 오미 지방의 한자 표기고, 성인이란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가리키는 최고의 호칭이에요.
에도 시대 일본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별명이 붙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도시 명문대 교수가 시골에 내려가 동네 야학을 여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사람들 마음을 더 깊이 건드렸다.
화려한 자리를 포기한 사람의 말은 무게가 달라요.

그가 주자학을 버린 이유는 학문의 우열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27세에 한 행동을 설명해줄 사상이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카에 도주는 처음에 주자학(朱子学)을 공부했어요.
주자학이란 12세기 중국의 주희가 체계화한 유학으로, 당시 막부가 공인한 정통 학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국가가 공인한 주류 이념 교육 같은 것이었다.
한데 37세 무렵, 그는 명나라 학자 왕양명(王陽明)의 책 한 권을 손에 넣었어요.
『전습록(傳習録)』이라는 책이었는데, 왕양명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와 어록을 모은 양명학의 핵심 텍스트였다.
그 책이 그의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주자학이 "책을 통해 이치를 쌓아라"라고 한다면, 양명학은 반대 방향이었어요.
"네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다. 그걸 따라라."
이걸 양지(良知)라고 부르는데, 스마트폰 공장 출고 설정처럼 태어날 때부터 도덕이 설치돼 있다는 개념이에요.
그제야 맞아떨어지는 게 있었어요.
27세에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건 책에서 배워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따른 것뿐이었다.
그는 일본 최초의 양명학자가 됐고, 자신의 사상을 『옹문답(翁問答)』에 담았어요.
옹문답이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양명학을 풀어낸 책이에요.
막부가 허가한 정통을 거스른 셈인데, 그런데도 박해받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다카시마 사람들은 그저 좋은 선생 하나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200년 뒤, 일본을 뒤집은 사무라이들의 책장에는 그의 『옹문답』이 꽂혀 있었다.
1648년, 나카에 도주는 41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마을 사람들은 통곡했고, 농부들이 직접 모은 돈으로 무덤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제자 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이 스승의 불꽃을 이어받았어요.
구마자와 반잔은 오카야마 번의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며 양명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사상가였다.
그 불꽃은 꺼지지 않고 조용히 타오르다 결국 폭발했다.
막말(幕末), 에도 막부가 붕괴하기 직전의 격동기였어요.
메이지유신을 이끈 인물들, 요시다 쇼인과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지사들이 일본 양명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내 마음의 양지를 따르라"는 한 마디가 근대 일본을 다시 세우는 사상적 도화선이 된 거예요.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칼을 내려놓은 스물일곱 청년.
그 한 명의 결단이 200년 뒤 한 나라를 바꿨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선택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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