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책 더미 속에서 자라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로마 귀족 아니키우스 가문의 아들 보에티우스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양부 심마쿠스의 집으로 들어갔다.
심마쿠스의 서재에는 그리스어 원전이 가득했다.
라틴어가 모국어인 로마 귀족에게 그리스어 원전을 독파하는 일은, 오늘날로 치면 영어권 학자가 아랍어 필사본을 원문으로 읽는 것과 비슷한 수고였다.
보에티우스는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510년 그는 집정관에 올랐다.
그리고 522년,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 아들이 같은 해에 동시에 집정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원로원 연단에 서서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로마 제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원로원은 아직 서 있었고, 그 원로원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 그가 있었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문명의 잔해 위에서, 한 인간이 책과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세우고 있었다.
지도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5세기 무렵 서로마가 무너지면서 라틴어를 쓰는 서유럽은 그리스어 세계와 서서히 단절되었다.
플라톤이 쓴 언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언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서방에서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의 지도 자체가 소실될 위기였다.
보에티우스는 이 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계획은 무모할 만큼 야심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플라톤의 전 저작도 번역한 뒤, 두 철학자가 실은 같은 진리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 여섯 편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번역본들은 12세기에 아랍어 경유 번역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수백 년간, 서방의 학자들이 논리학을 공부할 때 펼쳐든 것은 보에티우스가 잉크를 묻혀 베낀 그 문장들이었다.
한 사람이 밤늦게 등불 아래 갈대 펜을 쥐고 옮긴 번역이, 대륙 전체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권력의 풍향이 바뀔 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떨어진다.
523년, 원로원 의원 알비누스에게 고발장이 날아들었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게 비밀 서한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의 눈에 그것은 단순한 외교 접촉이 아니었다.
로마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신호로 읽혔다.
공개 재판이 열렸다.
보에티우스는 알비누스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고발이 근거 없음을 논증했다.
원로원 전체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왕의 심기를 거스르며 정의를 주장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이를 공모로 간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조된 서신이 증거로 제출되었고, 보에티우스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파비아의 세례당 감옥에 갇혔다.
불과 한 해 전, 두 아들의 집정관 취임을 원로원 연단에서 축하하던 사람이었다.
연설로 왕을 찬양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 차가운 돌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두꺼운 신학 논문도, 학술적인 철학 강의도 아니었다.
『철학의 위안』은 한 죄수가 죽음을 기다리며 쓴 책이다.
524년, 처형을 앞두고 보에티우스는 집필을 시작했다.
책의 문을 여는 장면은 이렇다.
감옥에 누운 자신에게 한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철학'이다.
여인은 그에게 묻고, 논증하고, 때로는 시를 읊는다.
산문과 운문이 번갈아 나오는 이 구성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었다.
논리로 이성을 설득하고, 시로 감성을 다독이는 이중의 방식으로, 독자를 — 그리고 감옥 안의 자신을 —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시도였다.
철학의 여인이 꺼내드는 주제는 세 가지다.
운명의 수레바퀴, 참된 행복, 그리고 악의 무력함.
수레바퀴의 비유를 이렇게 생각해보라.
회전목마는 꼭대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한, 꼭대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명은 그 수레바퀴다.
철학의 여인이 말하는 것은, 수레바퀴에서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수레바퀴임을 알고, 거기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후 알프레드 대왕이 직접 번역했다.
초서가 번역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번역했다.
중세 내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필사된 책이 되었다.
죽음을 앞둔 죄수가 감옥에서 쓴 책이 왕과 시인과 여왕의 손을 거쳐 천 년을 살아남았다.
524년, 보에티우스는 곤봉으로 구타당한 뒤 밧줄로 교살되었다.
그가 던진 질문들은 그와 함께 묻히지 않았다.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가.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안다면, 인간의 선택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당장의 위로가 필요한 한 죄수의 개인적 절규가 아니었다.
그는 그 질문들을 논리의 형식으로 조각했다.
반박 가능한 형태로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 질문들은 살아남아 중세 스콜라 철학 전체의 의제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책을 직접 인용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보에티우스를 천국의 빛나는 영혼들 사이에 세워두었다.
로마가 무너지고 고트족이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시대.
제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사라져가던 시대.
한 사람이 감옥 안에서 갈대 펜을 들었다.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대화를 기록했다.
그가 라틴어로 옮긴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백 년간 유럽 학자들의 유일한 스승이 되었다.
그가 감옥에서 던진 질문들은 그를 처형한 왕국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테오도리쿠스 왕의 이름은 역사책 각주에 남았고, 보에티우스의 이름은 그가 대화를 나눈 철학의 여인과 함께 천 년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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