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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녀가 죽은 도구는 칼도 창도 아니었다.
깨진 도자기 조각이었다.
415년 3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히파티아는 강의를 마치고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파라발라니라고 불리는 기독교 광신도 집단이 마차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그녀를 카이사레움 교회로 끌고 갔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쓰기도 읽기도 힘들다.
옷이 벗겨진 채로, 오스트라카라고 부르는 깨진 도자기 파편으로 살이 찢겼다.
시신은 키나론 들판에서 불태워졌다.
오늘로 치면 대학 강의를 마치고 퇴근하던 60대 여성 교수가 거리에서 군중에게 찢겨 죽은 것과 같다.
그녀는 무기를 든 적도, 정치 권력을 휘두른 적도 없었다.
60대의 수학 강사였다.
죽기 전 30년간,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들이 줄을 서서 듣던 강의의 주인은 히파티아였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은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의 마지막 수학자였다.
무세이온은 지금으로 치면 세계 최고의 국립 연구소 같은 곳이었다.
히파티아는 그 아버지 밑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익혔고, 디오판토스의 『산술』과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론』 주석서를 직접 썼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제자 시네시오스에게 보낸 편지다.
그 편지에는 히파티아가 아스트롤라베 제작법을 직접 가르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스트롤라베는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기로, 지금으로 치면 MIT 학장이 망원경 설계도를 제자에게 직접 손편지로 보내주는 셈이다.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알렉산드리아 수장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수학, 천문학, 영혼의 구조를 하나로 묶으려는 당시 최첨단 지적 운동이었다.
로마 총독도, 주교도 그녀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여성이 학문에서 철저히 배제된 시대에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야기가 된다.
그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죽었다.
412년, 키릴로스가 알렉산드리아 주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유대인 추방을 강행했고, 수천 명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로마 총독 오레스테스가 이를 막으려 했다.
오레스테스는 히파티아의 제자였다.
두 권력자의 충돌이 격화되던 중, 소문이 퍼졌다.
"히파티아가 마법으로 주교와 총독의 화해를 막고 있다."
그녀가 죽은 직접적 이유는 학문이 아니었다.
두 남자의 권력 다툼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회사에서 사장과 부사장이 싸우는데, 부사장과 친한 멘토라는 이유로 사장 측 직원들에게 표적이 된 것과 같다.
키릴로스가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파라발라니는 그의 교회 조직과 연결된 집단이었고, 5세기 교회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키릴로스에게 "불명예를 안겼다"고 직접 썼다.
그녀가 쓴 책은 한 권도 남지 않았다.
그녀를 죽인 자는 성인이 되었다.
히파티아가 죽고 나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 학파는 아테네로 이동했다.
수백 년간 세계 지식의 중심이었던 알렉산드리아는 그렇게 조용히 비어갔다.
우리가 오늘 히파티아를 아는 것은 제자 시네시오스의 편지들과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의 기록 덕분이다.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결국 키릴로스는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이자 교회 박사로 시성되었다.
히파티아의 이름은 1500년 가까이 거의 잊혔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야 '이성의 순교자'로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기록을 모두 태우고 가해자가 성인이 됐는데, 1500년 뒤에야 누군가 그 사건을 적은 옛 직원의 편지를 발견한 셈이다.
지금 우리가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편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지워진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방법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 편지를 버리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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