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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588년, 영국 해안으로 130척의 스페인 전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임산부가 공포에 질려 아이를 두 달 일찍 낳았다.
그 아이가 토머스 홉스다.
홉스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썼어요.
"공포와 나는 쌍둥이로 태어났다(Fear and I were born twins)."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게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이에요.
태풍 경보에 놀란 산모가 병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서 "인간은 원래 서로를 두려워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면?
공포로 시작된 삶이, 공포를 인간 사회의 설계 원리로 바꿔놓은 거예요.

1649년 1월 30일, 영국 왕 찰스 1세의 목이 런던 시민들 앞에서 잘렸다.
홉스는 이 소식을 파리 망명지에서 들었어요.
그가 도망친 이유는 간단해요.
영국 내전, 즉 왕을 지지하는 파와 의회를 지지하는 파가 총과 칼로 맞붙은 내전이 한창이었고, 홉스는 왕당파로 의심받았거든요.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시대였어요.
동네에서 총성이 들리고, 어제까지 같이 밥 먹던 사람들이 편을 갈라 서로를 향해 칼을 드는 상황.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황에서 "왜 이렇게 됐지?"라고 물어요.
홉스는 질문을 뒤집었어요. "아니, 원래 이게 인간의 본모습 아닌가?"
그렇게 파리 망명지에서 쓴 책이 『리바이어던』(1651)이에요.
국가 권력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논한 정치철학서로, 홉스가 직접 목격한 내전의 기록이기도 해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추상적 사고실험이 아니라, 창밖에서 실제로 벌어지던 일이었어요.

자유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문장이 근대 국가의 설계도가 됐어요.
홉스의 논리는 이렇게 흘러가요.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두 자유로워요. 그런데 자유롭기 때문에 서로를 죽일 수도 있어요.
결국 모두가 두려워하며 사는 전쟁 상태가 되죠.
그래서 홉스는 '사회계약'이라는 해법을 제시해요.
사회계약이란, 각자가 가진 자유를 하나의 절대 권력, 즉 국가에 넘기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는 약속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내가 칼을 들고 돌아다닐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경찰이 나를 지켜주는 구조예요.
그런데 이 논리는 양쪽 모두를 화나게 만들었어요.
왕당파는 "신이 왕을 만든 게 아니라 계약이 왕을 만든다고? 불경하다"고 분노했고, 의회파는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느냐"며 적대했어요.
홉스는 동시에 두 진영의 적이 됐어요.
CCTV, 개인정보 수집, 팬데믹 시기 이동 제한.
"안전을 위해 자유를 조금 포기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지금도 매일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어요.
홉스가 그 질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사람이에요.

1683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정에서 한 권의 책이 불에 탔어요.
300년 뒤, 같은 대학의 정치학 수업은 그 책 없이는 시작할 수 없게 됐어요.
홉스는 생전에 철저히 배척당했어요.
왕당파도, 의회파도, 교회도 그를 원하지 않았어요.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의회가 무신론자를 색출하는 법안을 만들 때, 심지어 홉스를 이름까지 거론했어요.
그런데 홉스는 91세까지 살았어요.
당시 평균 수명이 35세이던 시대에요.
금서 작가이자 이단자로 낙인찍힌 채, 자신의 사상이 역사에 남는 걸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어요.
하지만 홉스가 죽은 뒤 일이 벌어졌어요.
로크가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받아 "그래도 권력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고, 루소는 "계약의 주체는 국민이어야 한다"고 뒤집었어요.
그리고 미국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이 논쟁 전체를 교과서 삼아 새 나라의 설계도를 그렸어요.
사회계약론의 모든 후속 논의는 홉스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에게서 시작해요.
적도, 후계자도 모두 홉스 위에 서 있었던 거예요.
공포로 태어나, 공포를 연구하고, 모든 편에 버림받고, 그럼에도 35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사는 국가의 설계 원리를 남긴 사람.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던진 그 조산아의 이름을 이제 알게 됐으니, 오늘 뉴스에서 국가 권력 이야기가 나오면 한번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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