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이 율곡을 정면 부정한 이유
기정진은 한쪽 눈으로 평생 책을 읽었다
기정진의 왼쪽 눈은 다섯 살 때부터 보이지 않았어요.
천연두가 지나간 자리에 시력이 사라졌고, 그 뒤로 평생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 했어요.
그런데 이 시골 소년이 십대에 호남 지역 향시와 사마시에서 장원에 가까운 성적을 냈어요.
사마시는 성균관 입학 자격을 얻는 시험으로, 오늘날로 치면 수능 같은 관문이에요.
한양 명문가 자제들, 눈도 멀쩡하고 스승도 좋은 아이들을 전라도 장성 출신 외눈박이 소년이 모두 제친 거예요.
안경도 없는 시대에 한쪽 눈만으로 작디작은 한자 원문을 하루 종일 읽어야 했던 처지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안경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한 눈 감고 평생 봐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 눈으로 호남 최고의 천재 소리를 들었어요.
기정진은 평생 벼슬 임명장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가 임명장을 받을 때마다 답은 늘 같았어요.
가지 않겠다.
1838년 사축(司畜) 별제 임명을 시작으로, 호조참판, 동지돈녕부사까지 조정의 부름이 수십 차례 이어졌어요.
사축은 국가 가축을 관리하는 관청이고, 호조참판은 오늘날 기획재정부 차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에요.
그 어느 것도 기정진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걸 출세를 싫어해서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에요.
그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벼슬자리에 앉으면 더는 학문이 안 된다."
기정진은 전남 장성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어요.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당시엔 산림처사라고 불렀는데, 벼슬 없이 학문과 의리로만 사는 재야 지식인이라는 뜻이에요.
매년 명문대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시골 서재 한 칸에서 평생 연구만 하기로 한 학자를 상상하면 딱 맞아요.
기정진은 1866년 흥선대원군에게 6조 상소를 올렸다
벼슬을 수십 번 거절한 노인이 처음 붓을 든 것은, 외국 군함이 한강 어귀에 들어왔을 때였어요.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어요.
병인양요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 군대가 직접 밀고 들어온 충격이었어요.
조선 조정 전체가 뒤흔들렸어요.
그 직후 69세의 기정진이 상소문을 올렸어요.
「병인소(丙寅疏)」라고 불리는 이 글은 외세를 물리치고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6가지 건의를 담고 있었어요.
흥선대원군에게 자청해서 보낸, 사실상 선전포고 같은 글이었어요.
30년간 정치엔 손도 안 댄다던 사람이, 부르지도 않은 실권자에게 먼저 나선 거예요.
결국 이 「병인소」는 한국 근대사에서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출발점이 돼요.
위정척사는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맞선 조선 지식인들의 저항 논리예요.
기정진은 죽기 1년 전 율곡을 정면 부정했다
죽기 1년 전, 기정진은 호남 학자라면 누구도 건드리지 않던 이름을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글을 썼어요.
그 이름은 율곡 이이였어요.
율곡은 기호학파의 시조로 불리는 거장이에요.
기호학파는 서울과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학파로, 기정진이 살던 호남 지역과는 학문적으로 다른 전통이에요.
기정진이 쓴 글은 「외필(猥筆)」이에요.
제목이 "외람된 글"이라는 뜻인데, 기정진 본인이 이 글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완성한 거예요.
율곡의 「답성호원서」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이렇게 선언했어요.
"기(氣)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리(理)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리(理)와 기(氣)는 성리학의 핵심 개념이에요.
쉽게 말하면 리는 우주의 설계도이고, 기는 그 설계도에 따라 실제로 움직이는 엔진이에요.
기정진은 엔진이 설계도 없이 절대 혼자 작동할 수 없다고 주장했어요.
율곡은 이 둘이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고 봤어요.
하지만 기정진은 그게 틀렸다고 했어요.
제자들이 말렸어요.
"스승님, 이 글은 발표하지 마십시오."
기정진은 듣지 않았어요.
평생 한 회사에서 일한 임원이 은퇴 직전 창업주의 철학을 통째로 부정하는 책을 내는 것과 같아요.
학문적 자살에 가까운 선택이었어요.
「외필」은 기정진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 손에 의해 세상에 나왔어요.
지금도 한국 성리학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텍스트 중 하나예요.
평생 "외람된" 짓을 거부하던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외람된 글"이었다는 게, 그의 삶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