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가 청나라 땅을 밟지 않은 이유와 기 철학
왕부지는 명이 망하자 30세에 의병을 일으켰다
왕부지는 처음부터 산속의 학자가 아니었어요.
30세 되던 해, 그는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1619년 호남성 형양에서 태어난 왕부지는 책을 읽는 전형적인 선비였어요.
그런데 1644년, 명나라가 무너졌어요.
명나라는 한족이 세운 왕조로, 약 300년간 중국을 지배해온 나라예요.
그 명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멸망했어요.
오늘날로 치면 조용히 논문 쓰던 대학원생이 어느 날 자기 나라가 외국 군대에 점령당한 상황이에요.
왕부지는 4년 뒤인 1648년, 친구들과 함께 형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군에 맞섰어요.
결과는 패배였어요.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어요.
곧 남명 정부에 합류했는데, 남명은 명이 망한 뒤 남쪽에서 황족이 세운 잔존 정권이에요.
거기서 행인이라는 직책을 맡았어요.
행인은 외교 의례를 담당하는 관직이에요.
그런데 그는 조정의 실세 왕화징이 나라를 망친다고 보고 탄핵 상소를 올렸어요.
결과는 처형 위기였고, 결국 왕부지는 도망쳤어요.
왕부지는 우산과 나막신으로 청나라 하늘과 땅을 거부했다
왕부지는 맑은 날에도 우산을 썼어요.
비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1650년대, 남명 정권마저 무너지고 청이 천하를 장악하자 왕부지는 호남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어요.
그때부터 외출할 때마다 반드시 우산을 펴고 나막신을 신었어요.
이유는 이 한 문장이었어요.
"머리는 청나라 하늘을 이지 않고, 발은 청나라 땅을 디디지 않는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거예요.
어떤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그 나라 도로를 평생 맨발로 밟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걸 수십 년 동안 매일 몸으로 실천했어요.
변발도 끝내 하지 않았어요.
변발은 청나라가 한족에게 강요한 머리 모양으로,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하나로 땋는 방식이에요.
청에 복종한다는 표시였고, 이를 거부하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왕부지는 죽을 때까지 명나라 선비의 머리 모양을 지켰어요.
왕부지는 석선산에 40년 숨어 400권을 혼자 썼다
왕부지가 석선산에서 쓴 400권 가운데, 그가 살아있는 동안 세상에 인쇄돼 나간 책은 거의 없었어요.
석선산은 형산 자락의 작은 봉우리예요.
이름을 풀면 '돌배 산'이에요.
왕부지는 여기에 초가집을 짓고 스스로를 '선산유로'라 불렀어요.
선산유로란 "선산에 남은 명나라 유민 노인"이라는 뜻이에요.
인터넷도 출판사도 독자도 없이, 그는 손으로 원고를 써서 산속 창고에 쌓아두는 작가였어요.
그렇게 약 40년 동안 100여 종, 400여 권이 쌓였어요.
대표작 「독통감론」은 중국 역대 왕조의 정치를 기록한 역사서 「자치통감」을 읽으며 쓴 비평이에요.
「송론」은 송나라 정치를 분석한 글이고, 「장자정몽주」는 북송 학자 장재의 철학을 주해한 책이에요.
이 책들에서 왕부지는 당시 주류 철학 주자학을 뒤집는 주장을 펼쳤어요.
주자학은 "이(理), 즉 우주의 법칙이 기(氣), 즉 물질보다 앞선다"는 사상이에요.
왕부지는 반대로 "이는 기 안에 있다"고 했어요.
기(氣)는 세상 만물을 이루는 물질적 에너지예요.
오늘날 말로 하면 "법칙이나 이상보다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 먼저다"라는 주장이에요.
관념보다 현실이 앞선다는 거예요.
그래도 이 책들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거의 읽히지 않았어요.
왕부지는 그냥 계속 썼어요.
왕부지를 200년 만에 살려낸 사람은 청의 충신이었다
왕부지를 2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꺼낸 사람은, 청 왕조에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였어요.
1692년 왕부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원고는 후손과 형양 일대 학자들 사이에서만 필사본으로 조용히 돌았어요.
그렇게 약 170년이 흘렀어요.
그러다 19세기 중반, 증국번이 왕부지의 글을 발굴했어요.
증국번은 한족 출신이지만 청 왕조에 충성을 다한 최고위 신하예요.
19세기 중반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진압한 공신이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동생 증국전과 함께 1865년 금릉에서 「선산유서」 322권 전집을 출간했어요.
청에 저항한 학자의 책을, 청의 충신이 사재를 털어 찍어낸 거예요.
그 뒤가 더 놀라워요.
청 말기 개혁 사상가 양계초와 담사동은 왕부지의 글에서 변법, 즉 정치 개혁의 근거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 무렵엔 왕부지가 한족 민족주의와 반청 사상의 뿌리로 떠올랐어요.
청을 거부하며 400권을 혼자 쌓아두고 죽은 학자가, 결국 청을 무너뜨리는 혁명의 사상적 원류가 된 거예요.
그 산속 초가집에서 홀로 붓을 들던 왕부지는 과연 이걸 예상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