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를 발견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를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제자였다
레비나스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하이데거의 이름을 발음할 줄도 모르던 시기에 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이었어요.
1928년, 스물두 살의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철학자 두 명의 강의를 직접 들었어요.
한 명은 에드문트 후설, 의식의 흐름을 분석하는 현상학의 창시자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제자 마르틴 하이데거였어요.
하이데거의 강의는 레비나스에게 충격이었어요.
1930년 박사논문에서 그는 하이데거를 "시대 최고의 철학자"라고 공개적으로 격찬했고, 2년 뒤엔 논문 〈마르틴 하이데거와 존재론〉을 발표해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하이데거를 본격 알렸어요.
당시 프랑스에서 하이데거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는데, 레비나스가 그 이름을 처음 무대에 올린 셈이에요.
그런데 1933년, 상황이 뒤집혔어요.
하이데거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해 나치 정권에 협력했어요.
평생 존경한 스승이 어느 날 자기 동족을 학살하는 정권의 사상적 동조자가 된 거예요.
그날부터 레비나스의 모든 철학은 단 하나의 질문이 됐어요.
"어떻게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가장 큰 폭력에 협력할 수 있었나?"
그 질문을 붙들고 그는 평생 하이데거를 거슬러 올라갔어요.
레비나스는 군복 덕분에 살아남고 가족은 전부 잃었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이었지만 프랑스 군복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혀 가스실을 피했어요.
1939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러시아어·독일어 통역병으로 전쟁에 동원됐어요.
그리고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지면서 포로가 됐어요.
그를 살린 것은 우연히 걸치고 있던 군복이었어요.
제네바 협약은 정규군 전쟁포로를 별도로 보호하도록 규정하는데, 군복은 그를 "유대인"이 아닌 "프랑스 전쟁포로"로 분류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절멸수용소가 아닌 팔링보스텔 인근 노동수용소에서 1945년까지 5년을 벌목 작업으로 버텼어요.
하지만 그 군복은 리투아니아에 있는 가족을 한 사람도 구할 수 없었어요.
고향 카우나스에 있던 부모와 두 형제는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모두 살해됐어요.
아인자츠그루펜이란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현지에서 즉결 학살하도록 편성한 이동 특수부대예요.
아내 라이사와 딸 시몬은 프랑스 오를레앙의 한 가톨릭 수녀원에 숨어 가까스로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레비나스는 수용소 안에서 종이 쪼가리에 조용히 글을 적었어요.
그 메모들은 훗날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철학책이 됐어요.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살인을 금지한다고 썼다
레비나스는 모든 철학 이전에 윤리가 먼저 와야 한다고 선언했어요.
서양 철학은 2500년간 "존재란 무엇인가"를 물어왔어요.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 질문 자체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해버리는 폭력이라고 봤어요.
그의 대안은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해요.
길에서 낯선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왠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지는 그 짧은 경험이요.
레비나스는 그걸 "타자의 얼굴(visage)"이라고 불렀어요.
타자의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 무언의 명령이 날아온다고 했어요.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이 명령은 법률이나 계약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얼굴을 봤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1961년 《전체성과 무한》, 1974년 《존재와 다르게》에서 그는 이 주장을 완성시켰어요.
그는 "윤리는 제1철학"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철학이 세워온 서열 전체를 뒤집는 말이에요.
윤리는 사유 이후에 추가하는 장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거기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레비나스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거였어요.
하이데거는 유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레비나스는 무명의 유대학교 교장이었다가 데리다의 글로 발견됐다
레비나스는 50대 후반까지 파리의 한 작은 유대학교 교장이었어요.
전쟁이 끝난 1946년, 그는 동방이스라엘사범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어요.
이 학교는 북아프리카 유대인 교사를 양성하는 소규모 기관으로, 주요 대학 철학과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그는 거기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매주 토요일 탈무드 강독을 이어갔어요.
탈무드는 유대교 율법과 랍비들의 토론을 집대성한 방대한 텍스트로, 레비나스는 평생 그 안에서 철학을 발굴했어요.
하지만 당시 학계에서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변방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1963년, 상황이 달라졌어요.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100쪽짜리 긴 논문을 발표하며 레비나스를 정면으로 다뤘어요.
데리다는 당시 프랑스 철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였는데, 그가 "레비나스를 주목하라"고 선언한 셈이었어요.
그 논문이 나오자 레비나스의 삶이 달라졌어요.
1964년 푸아티에 대학, 1973년 소르본 대학 정교수로 연달아 임용됐어요.
작은 학교 교장이 세계 최고의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그를 끌어당긴 건 변방에서 30년간 혼자 쌓은 사유였어요.
오늘 지하철에서 당신이 스쳐 지나간 낯선 얼굴들이 있었을 거예요.
레비나스는 그 얼굴 하나하나에 이미 윤리가 새겨져 있다고 했어요.
우리가 그걸 못 보는 게 문제라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