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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서점에서 두꺼운 연애 소설을 집었는데, 알고 보니 그 작가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면 조금 갸웃하게 되죠. 아이리스 머독이 딱 그런 사람이에요. 1919년에 태어나 1999년까지 산 영국 작가인데, 평생 소설을 스물여섯 권이나 썼어요. 사랑하고 질투하고 속이고 후회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요. 그런데 같은 손으로 도덕에 관한 철학책도 함께 썼어요. 우리는 보통 소설은 재미로 읽는 거고 철학은 머리 아픈 공부라고 따로 떼어 생각하잖아요. 머독은 그 둘이 사실 같은 질문을 붙잡고 있다고 봤어요.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일까, 하는 질문이요. 그래서 그를 흔히 '철학을 쓴 소설가'라고 불러요.

우리는 보통 착한 일을 '행동'으로 생각해요.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히 답하기, 자리를 양보하기처럼요. 그래서 도덕은 선택의 순간에만 잠깐 등장하는 것 같죠. 그런데 머독은 좀 다른 곳을 봤어요. 행동하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이미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구는 '게으른 인간'으로 보고, 누구는 '많이 지친 사람'으로 봐요. 아직 아무 행동도 안 했는데, 보는 순간 이미 마음속에서는 판단이 끝나 있는 거죠. 머독은 진짜 도덕은 바로 이 '보는 방식'에 있다고 했어요. 잘 보는 사람이 결국 잘 행동하게 되니까요.

머독이 든 유명한 예가 있어요.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못마땅해해요. 속으로 '천박하고 버릇없고 촐랑댄다'고 여기죠.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안 해요. 늘 예의 바르게 대하니까 누가 봐도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마음먹어요. 내가 혹시 편견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자. 그렇게 오래 마음을 기울여 보니 며느리가 달리 보여요. 천박한 게 아니라 솔직하고, 촐랑대는 게 아니라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던 거죠. 여기서 신기한 점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며느리는 멀리 떠났을 수도,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시어머니 안에서는 분명히 진짜 도덕적인 일이 일어났어요. 더 정확하게, 더 너그럽게 보게 된 그 변화요.

머독은 이렇게 마음을 기울여 바라보는 일을 '주의'라고 불렀어요. 영어로는 어텐션인데, 시험 볼 때 집중하라는 그 주의랑은 결이 달라요. 상대를 내 기분이나 이익에 맞춰 멋대로 색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만히 보려는 노력이에요. 이게 왜 어렵냐면,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는 늘 '나'라는 커다란 덩어리가 버티고 있거든요. 내 자존심, 내 손해, 내가 받고 싶은 인정 같은 것들이요. 그게 자꾸 세상을 내 입맛대로 비틀어 보게 만들어요. 머독은 좋은 것을 가만히 바라보면 이 '나'가 잠깐 작아진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창밖의 새 한 마리를 넋 놓고 보는 순간, 내 걱정이 잠시 사라지잖아요. 그렇게 나를 잠깐 잊는 연습이 쌓여서 사람을 더 맑게 보는 힘이 된다는 거예요.

그럼 머독은 왜 이 생각을 철학책으로만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굳이 두꺼운 소설을 스물여섯 권이나 썼을까요. 사람을 잘 본다는 게 어떤 건지는 설명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기 때문이에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오해했다가, 천천히 진짜 모습을 알아 가고, 때로는 끝내 못 알아보고 어긋나는 그 긴 과정을 보여 주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요.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낯선 인물의 속마음에 한참 머물게 되죠. 그게 바로 머독이 말한 '주의'의 연습이에요. 그래서 그에게 소설 쓰기와 철학하기는 다른 일이 아니었어요. 둘 다 사람을 더 잘 보게 도와주는 같은 일이었던 거죠.

아이리스 머독은 착함을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의 문제로 바꿔 놓은 사람이에요. 내 기분에 맞춰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그렇게 나를 잠깐 잊는 연습이 곧 도덕이라고 봤죠. 그리고 그 보는 힘을 기르는 데 이야기만 한 게 없다고 믿어서, 철학과 소설을 한 손으로 함께 썼어요. 오늘 누군가가 미워질 때 한 번 더 천천히 바라보는 것, 그게 머독이 우리에게 남긴 작은 숙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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